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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27. 2024

아름답지만 슬픈 '뽀르또마린'

- 걷기 30일 차 -

갈라시아 주의 날씨는 계속 변덕을 부리지만 주변 경관은 수려하다. 사방으로 눈을 돌리며 걷느라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이다. 뽀르또마린까지 걷는 길도 그렇다. 까미노길의 제주스러움이라면 말이 될까. 오늘 걸은 길은 스페인의 제주였다. 셀레리오 강을 건넌 이후 만난 풍광은 오름에서 바라보던 제주였고, 사려니 숲길과 곶자왈, 비자림 등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이끼 낀 돌담은 또 어떠했던가. 이율배반이다. 너른 들판에 말 대신 소가 있었던 것으로 다름을 얘기한다면 모순이다.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길이 이어진다. 하늘은 푸르고 내 정신은 맑은 하늘에서 마음껏 뛰논다. 제주의 올레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적막하고 고요해 나를 모두 꺼내놓아야 할 것 같은 투명함. 감춘다고 감춰질 것 같지 않은 나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며 걷는 길. 까미노 길이 내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행복하다. 오랜만에 만난 햇살은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함께 걸은 길동무는 친절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났다. 기념이지 싶어 사진으로 한 장 찍어 쟁여둔다. 그동안 이 길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을 보아 왔을 이정표는 묵묵히 말이 없다. 이정표에 채워진 흔적만이 고달픈 순례자의 애환을 뿜어낸다.   



외딴곳에 위치한 손바닥만 한 성당을 지나 정처 없이 걷다 만난 ‘뽀르또마린’은 오늘 머물 곳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과거를 갖고 있는 이 마을은 댐 건설을 위해 1960년대에 마을을 수몰시켰단다. 원주민은 마을이 물에 잠긴 후 언덕 위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이주했다. 하지만 슬픈 기억 속의 삶터까지 옮겨진 것은 아니다. 높디높은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니 강가의 돌계단이 물속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아니,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인가?

물에 잠긴 계단은 옛 마을의 흔적이 분명하건만 말이 없다. 새 마을로 진입하는 새로 조성된 긴 계단만이 물밑에 가라앉은 계단과 연결된 듯 끝없이 올라간다. 뽀르또마린 주민의 삶이 아픈 역사와 함께 끊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가 보다.   

      

수몰된 마을이 안고 있는 공통점은 애잔함이다. 산 니콜라스 성당은 마을이 수몰될 때 벽돌 하나하나마다 번호를 적어 옮겨와 새 마을에서 순서대로 다시 짜 맞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성당 외벽 곳곳에는 숫자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앞에 서면 숙연하다. 산 페드로 성당은 옛 마을에 있던 성당에서 파사드만 옮기고 나머지는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낯선 곳에서 보고 듣는 온갖 것들은 내 기억 속의 아련함과 연결된다. 스페인의 수몰마을을 보며 우리나라의 수몰마을을 생각한다. 소양강댐이 생길 때 물에 잠긴 춘천시 북산면, 춘천댐이 만들어지며 사라진 춘천시 사북면 그리고 횡성댐이 건설되며 물밑으로 가라앉은 횡성군의 다섯 마을이 그것들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우리의 삶은 무조건적인 것도 일방적인 것도 없나 보다.  

    

물에 잠긴 북산면을 배경으로 소설가 윤대녕 님은 『소는 여관으로 들어간다 가끔』을 썼고, 사북면이 사라질 때 전상국 님은 『아베의 가족』을 집필하며 사라진 마을에 대한 기억을 저장했다. 횡성군에서는 옛 마을에 대한 애환을 <호수 길>이란 이름으로 만든 길 위에 스토리텔링으로 입혀 놓았다. 

국내의 세 마을을 모두 걸었던 나는 이 길과 그 길의 다름을 말할 수 없다. 그림 같은 풍경과 잔잔한 수면에 투영되는 인간의 삶이 동양과 서양이라고 다를 수 없음이며 느끼는 감정 또한 같기 때문이다.     

 

온갖 상념에 사로잡힌 채 미뇨강에 새로 놓인 높다란 다리를 건넌다. 갈리시아의 젖줄인 340km의 미뇨강 물을 바라보며 길동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강 건너에는 미뇨강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로만 음식을 하는 맛 집이 있다고 했다. 


성찬에 감탄한다. 마치 춘천의 소양강에서 잡아 올렸음직한 물고기 요리이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미뇨강 가의 레스토랑에서 받은 민물고기 한 상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간다’를 각인시킨다. 

옛 터에 대한 애잔함과 그리움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의 기억은 간직해야 할 우리의 정신 유산이며 삶의 흔적이다.      

   

토끼라고 주장하며 거북이처럼 걸었다. 지금의 내 발목 상태로는 최선의 걸음이다. 까미노 아부지가 사다 준 발목 보호대와 스틱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까미노길 위에 담긴 세상살이의 애환에 내 걸음과 숨결이 응답한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말고 꾸준하게. 부엔 까미노!     


* 걷기 30일 차 (사리아~ 뽀르또마린(Portomarin)) 22.5km / 누적거리 70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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