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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 Jan 12. 2024

넷플릭스_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Carol & The End of The World」

*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 작품 *


12월에 공개된 따끈따끈한 신작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Carol & The End of The World)를 우연히 보고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던 에피소드가 있어서 기록으로 남겨본다.


미국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이라 넷플릭스에서 미국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데, 신작 알림이 뜬 걸 보고 내 취향일 것 같아서 보게 되었다. 정말 내 취향이었다. 그리고 정말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이다.


종말이라고 모두가 똑같이 정신없이 시끄럽게 놀 필요는 없잖아요?


종말로 인해 한정된 시간을 열정적으로 화려하게 즐기는 사람들 속에 중년의 고독한 캐럴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기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즐기는 선택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늘 미뤄두기만 했던 휴가를 가거나, 엄두도 못 냈던 어떤 액티비티에 도전한다든가, 어쨌든 모든 일상을 벗어던지고 맘껏 즐기고 노는 일. 캐럴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그 부분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그렇기 때문에 캐럴 만의 독특한 종말의 생활이 펼쳐진다. 이 부분에서 캐럴에 공감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정해지지 않을까 싶다.


인류멸망이 코앞이라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 끝나지 않은 일상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에서는 인류멸망(지구멸망?)까지의 남은 디데이가 정확히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 카운트다운이 이어진다. 모두가 말 그대로 '내일이 없는 것 같은' 생활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 속에도 '일상'이 있다는 것을 이 애니메이션은 보여준다. 분위기에 휩쓸려 그저 남들 다 하는 무언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지만 내 방식대로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어떤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런 커다란 재앙 앞에서 일상이 위안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고 관계를 맺고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고… 그런 것들이 어쩌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에서는 곧 끝날 운명이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으로서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달라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이 작품과 관련해서 꼭 언급하고 싶은 에피소드는 4화 두 자매 편이다. 이 작품 전체를 떠나, 이 편 하나가 내 인생에 남을 에피소드였고,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난 뒤에 느낀 수많은 감정과 경이로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캐럴은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의 언니가 있다. 둘은 정말 다르고, 그래서 오해하고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을 뿐, 실제로는 둘 사이에는 깊은 애정이 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방식이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방식이어도 그래도 둘 사이에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정말 너무나도 따듯하고 감동적이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관계와 삶에 대한 메시지가 이어지지만, 이 에피소드가 특별히 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호불호를 떠나서 대중적으로도 어필할 수 있으면서도 상당히 재치 있고 완성도 높은, 사실 다른 배경 없이 그 한 화만으로도 충분히 풍부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편이었다.


애매한 떡밥과 아쉬운 에피소드들


소신 발언을 하자면, 나는 애매하게 (사실 애매하게가 아니라 대놓고) 시즌 2를 위한 떡밥을 남겨놓거나, 애매하게 완결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 시즌아 나오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임에는 분명 하나, 제작이 불발될 경우 그 애매하게 남은 것들은 가려운 곳을 남기게 되니까. 그것은 열린 결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냥 결말이 없는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므로 씁쓸함을 남긴다.


이런 나의 선호와는 정반대로, 요즘 제작되는 시리즈 물들이 다음 시즌을 고려하지 않은 결말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 점이 조금 더 짜증스러운 이유는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난 애매한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9화 바닷물 자장가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 밖에 없었다. 이... 에피소드가 꼭 필요한가?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중심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고, 번외 편에 가까운 편으로, 나는 아직도 이게 캐럴 세계관에서 실제 벌어진 일인지, 단순한 캐럴의 상상인지,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 에피소드 대신 메인 스토리의 떡밥에 대한 이야기를 푸는 게 더 전체 작품의 일관성을 높이지 않았을까? 큰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만, 무엇보다 인류멸망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시청자가 죽음과 삶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아웃사이더에 내향적인 캐럴을 보면서 어쩌면 조금 다른 사람을 엿보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나 같은)에게는 큰 공감과 위로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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