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페이지 자서전 《페이지보이 Pageboy》
※ memoir은 자서전, 회고록, 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해당 저서는 회고록보다는 자서전 쪽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이하 자서전이라 칭합니다.
엘리엇 페이지의 자서전이 나온 걸 알게 되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완전히 바꾼 책 중 하나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보통 책을 읽으면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하는 특정한 타겟층이 생각나는데, 이 책은 과장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내가 더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나를 계몽하는 책이었다.
엘리엇이 된 엘렌에게서 느낀 거리감
나는 엘렌 페이지를 좋아했다. 그녀의 어색하고 소년 같은 면이 좋았다. 소년이 아니라 '소년 같은 소녀'라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그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게이와 레즈는 이제는 나에게 너무 익숙하다 못해 흔해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 개념이었고, 엘렌은 어떤 면에서 너무 전형적인 퀴어의 모습을 한 사람이어서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를 하고 수술을 받았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엘렌 페이지를 좋아했기 때문에 엘리엇 페이지의 선택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을 충분히 포용하기에 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언가 나와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트랜스젠더는 내 안에 있어서 모호한 개념이었다. 모른다는 단순한 말로 설명하기에는 굉장히 복잡한 어떤 것이었다. 세상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감각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트랜스젠더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트랜스젠더는 내가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입에 올릴 수 없는 어떤 개념에 불과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트랜스젠더라는 감각
페이지보이는 나에게 정말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겠지만 트랜스젠더가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할 수밖에 없는 감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너무나도 날 것의 괴로움이어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엘리엇 페이지는 트랜스젠더가 흔히 받는 질문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언제부터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느냐 하는 정말 흔하디 흔한 질문.
태어난 성, 부여받은 몸과 자신의 자아 인식이 일치하고 그것으로 평생 자신을 경험해 온 사람들은 이 질문이 무례하고 무지한 것과는 별개로, 어쩌면 당연히-내가 그런 것처럼-이 감각이 궁금할 것이다. 무엇이, 어떤 계기가 그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지. 한 번도 그 감각이 엇나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없는 경험이니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세상의 주류인 시스젠더(*태어난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는 경험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내가 가진 몸과 내 머릿속의 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해했다기보다는 나는 외웠다. 그냥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은 막연하고 동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불일치를 경험했고, 그 경험이 나를 바꾸었다.
도망갈 수 없는 몸 안에 갇혀 있는 트랜스젠더
엘리엇 페이지는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꾸준하게 느껴왔던 자신의 몸에 대한 불쾌감을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불쾌감을 벗어나려고 한 노력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고 있으면 도저히 젠더퀴어들의 불쾌감을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내 몸이 불쾌하다면 어떻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매일 아침 눈뜨면 만나는 내 몸이 끔찍하다면,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 것조차 버겁다면 살아있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성별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나도 내 몸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때가 있다. 사회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여성의 몸에 미치지 못하는 내 몸이 끔찍이 싫었고, 거울에 비친 내가 흉측하기만 했다. 내 몸에 붙은 살들을 볼 때마다 모두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매일 눈을 뜨는 것이 괴로웠다. 내 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저주처럼 느껴졌다. 엘리엇 페이지의 자신의 몸에 대한 불쾌감을 서술하는 부분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감각들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비슷한 느낌이라면 아니 이보다 훨씬 깊고 큰 격차가 있는 것이 분명한 그 불쾌감일 것이 분명할 텐데, 이제껏 어떻게 견뎌왔단 말인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일
이제껏 미디어에서 내가 접했던 트랜스젠더는 한쪽 성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주로 그려졌었던 것 같다. 특정 성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동경하는 모습이나, 어쩌면 사회적으로 그 성별에게 크게 기대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부분을 얻고자 하는 바람 같은 것들로 말이다. 내 머릿속에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첫 이미지는 남성이 여성의 속옷을 입고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특정 인물이 특정 성별의 특정한 모습이 되길 원하는 것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페이지보이》를 읽으면서 단순히 그것이 '갈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단순히 성별을 '원하는 모습'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선택이나 기호의 문제로 보인다.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이해가 어렵다. 나는 굳이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이라는 점을 짚어내면 젠더퀴어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여자 또는 남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내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이제껏 우리는 어떤 선호의 문제로 여겨온 것은 아닐까?
개인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
엘리엇 페이지는 자신이 연기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다른 젠더퀴어들에 비해 많은 기회를 누렸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그가 조금 나은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그가 덜 괴로웠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성소수자들이 많다. 이들이 쉽게 혐오 범죄에 노출되고 심지어 살해 당하는 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떤 면에서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룬 트랜스젠더가, 지나간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든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이런 이야기를 공유해 준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페이지보이》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 이렇게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통감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나에게는 젠더퀴어들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들을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젠더퀴어들을 내 옆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음을 열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면 그 사람을 수식하는 많은 수식어구들 대신 그 사람만 남을 수 있다.
페이지보이가 트랜스젠더의 이야기가 아닌 그냥 엘리엇 페이지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더 폭넓은 정보를 접할 기회를 얻는 영어 원서 읽기
영어로 된 글을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진 이후 가장 큰 축복은 영어로 쓰인 글들을 지체 없이 바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번역본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작품을 그저 번역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혹여 한국어판 발매 예정이 있다고 해도 그 작업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출시된 최신 작품을 바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내가 영어 공부를 하고 거둔 최고의 수확이다.
특히나 이런 성소수자 관련되어서는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한참 부족하다. 이건 단순히 지식 정보적인 측면을 넘어 다양한 미디어, 문학 작품 등의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예전보다 성소수자가 포함된 작품이나 프로그램이 늘었다고 해도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한참 부족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내가 영어 원서를 읽지 않았다면 트랜스젠더의 내밀한 속을 접할 기회는 아마 한참 후가 되지 않았을까.
엘리엇 페이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트랜스젠더인 작가의 자서전을 굳이 고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일부러 자주 접하지 못하는 주제를 가진 원서를 찾아서 읽는 것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어쩌면 그게 나를 조금 불편하게 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 모든 사진 출처는 엘리엇 페이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lliot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