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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서 하는 습관과 이별중입니다

불안을 에너지가 아닌 스트레스로 인식하기 시작한 팀장의 성찰

by 하랑팀장

"당신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신가요?"


조직 생활 28년 차, 수많은 다면평가와 코칭을 거치며 나에 대해 스스로 꽤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정작 '인간 하랑'의 깊은 내면을 마주하기 시작한 건 고작 3~4년 전부터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업무는 제외하고 일상에서는 '미리미리'가 도저히 체화되지 않는 사람이다. MBTI로 따지면 계획형(J)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인식형(P)에 가깝다.


내일 라운딩이 잡히면 남편은 전날 밤에 보스턴 백을 챙기지만, 나는 당일 새벽에 일어나 허둥지둥 짐을 싼다. 해외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남편의 캐리어는 전날 밤 정확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내 가방은 출발 당일 아침까지도 입을 벌린 채 거실에 널브러져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싫어 수없이 다짐해 봤지만, 촉박한 시간의 압박 속에서야 비로소 몸을 움직이는 오래된 관성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벼락치기라는 달콤한 유혹과 그 뒤에 찾아오는 놓침에 대한 후회, 그 무한 궤도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과제 혐오(Task Aversiveness)'나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와 연결해 설명한다. 해야 할 일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나, 수많은 준비물 중 무엇부터 챙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소모해 실행을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간 닥쳐서 하는 습관을 '에드레날린을 이용한 효율적인 처리'라고 합리화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효율이 아니라, 그저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최근 10km 마라톤을 앞두고서도 버릇은 도졌다. 마라톤 대회 2주 전부터 하루에 조금씩 달리기를 연습하고, 아울렛에 가서 고심 끝에 러닝복을 샀다. 이 두 가지를 미리 해둔 건, 신체적인 준비와 장비 마련은 도저히 벼락치기가 안 된다는 본능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기념 티셔츠에 배번호판 달기'나 '복장 챙기기' 같은 마지막 실행 단계는 여전히 당일 아침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마라톤 기념 티셔츠를 미리 입어보고 사이즈나 착용감을 체크하면 좋으련만, 그 작은 수고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이번 대회 전날 오후에는 실행에 옮겼다. 불편한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미리 준비하는 게 현명한 '스트레스 관리 비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입고 갈 레깅스와 반바지를 챙겨두고, 윗옷에 배번호판을 옷핀으로 꼼꼼하게 붙였다. 신고 갈 양말까지 한군데 모아놓으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는 미완결된 과제가 주는 심리적 압박인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를 미리 해소한 셈이다.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걱정을 덜어냄으로써, 신경계의 안정과 질 좋은 휴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8년 동안 수많은 업무 마감(Deadline)을 철저히 관리하고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대응해왔으면서도, 정작 내 삶의 작은 준비 앞에서는 왜 그리도 관대했을까. 업무적 계획형이라는 유능함 뒤에 숨어, 일상에서 자꾸 미루는 나를 그저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는지도 모른다.



"마라톤 전날 밤, 고요한 질서 속에서 잠을 청했다. 이 사소한 변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갉아먹던 해로운 긴장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닥쳐서'라는 단어와 서서히 멀어지는 연습. 그것은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내 삶의 리듬을 스스로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기분 좋은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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