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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Jul 13. 2024

오티움과 번아웃

 반갑지 않은 손님, 번아웃이 다시 찾아왔다. 문간방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면 좋으련만 이리저리 몸과 마음을 휘젓고 다닌다. 친구가 집에 놀러라도 올라치면 불청객을 보이기 싫어 손사래를 치며 괜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내 집에서도 편히 못 쉬니 눈은 퀭해지고 회사 업무도 시큰둥해졌다. 손님 상판대기가 보기 싫어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까지 무겁다.


 번아웃은 왜 찾아온 걸까? 슬금슬금 올 때는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요놈!또 찾아왔구나’ 깨닫게 되지만 매번 속수무책이다. 짧게는 며칠을, 길게는 몇 주를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그동안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눌러왔던 사업전략발표를 어제 잘 마쳤다. 3주간 나를 괴롭혔던 번아웃의 긴 터널에서도 이제야 겨우 빠져나온 것 같다.


 번아웃의 원인을 곰곰이 짚어 보았다. 시간과 에너지 관리의 오류, 인풋 과잉, 강박이 부른 피로감 때문이었다.


 상반기 내내 ‘기한 독촉’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고 독후감 쓰는 6개월간의 W 프로젝트를 완주했다. 퇴직 후 인생 2막에 대한 계획과 10년 후의 10대 풍광을 이미 이룬 것처럼 적어 제출하는 마지막 숙제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에 무리했다. 회사, 가정일, 크고 작은 행사로 인해 과제에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음에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는 해냈다. 그 저변에는 무조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에누리 없는 대쪽 성향이 큰 몫을 했다. 나는 주어진 과제가 힘이 들수록 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 환경을 세팅한다. 비용을 많이 들여 중간에 멈출 수 없게 하든지, 뱉은 말을 무조건 지키는 나의 성향을 역이용하거나 함께 하는 사람들 간에 경쟁심을 스스로 부추긴다. 완결 후의 뿌듯함을 자주 연상시키는 셀프 넛지(nudge)에 엮여 오히려 종종거리며 사는 것 같다.

  

 두어 달 팀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준비했던 감사가 무사히 끝났다. 심리적 부담이 컸던 조직장의 액션 러닝 최종 발표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았다. 끝나고 나서는 뿌듯했지만, 준비기간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매일 야근으로 이어진 7일간의 감사 기간은 나도 팀원들도 성장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로 잡힌 액션 러닝 최종보고회였다. 퇴근 후에 발표 연습에 집중할 계획이었지만, 감사가 끝나니 온몸의 긴장이 확 풀렸고 집에 오자마자 실신하듯이 뻗어서 잤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출근 전까지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시간뿐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발표 자료를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슬슬 시동을 걸었다. 책상에 앉아 PPT 내용을 이야기 전개에 맞춰 일부 재구성하고 3회 정도 입으로 연습한 후에 본격적으로 일어서서 실제 발표하듯이 리허설하며 녹음했다. 녹음된 내용을 들으면서 고치고, 다시 고치기를 3시간, 불안이 줄어들면서 조금씩 빛이 보였다.     

‘어떻게든 해내는’ 오기 정신 덕분에 위기는 넘겼지만, 이런 벼락치기가 너무 잦아서 감정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음번에는 미리 준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그때뿐, 다짐뿐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옛말이 맞다. 40여 명이 직원과 부대끼다 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부서장 3년 차의 내공을 기반으로 ‘기특하다’ 할 정도로 부서를 잘 이끌 때도 있지만 팀원들을 노련하게 이끌지 못할 때는 스스로 실망이 크다. 멈춤의 미학을 실천하고 싶다.


 운동을 할 시간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데 그 시간에 일을 만드는 습성도 문제라면 문제다. 바빠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매일 새벽에 진행되는 줌(Zoom) 강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어떻게든 듣는다. 나 역시 그 커뮤니티에서 한 달에 2회 강의를 하므로 줌 참석에 대한 열의가 높다. 강의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는 상당하지만 마치고 난 뒤의 뿌듯함과 성취감 때문에 매달 계속하고 있다.

 

 시간 도둑이지만 포기 못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골프다. 골프는 통상 몇 달 전에 약속이 잡히는 데다, 골프 라운딩은 절대 취소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어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 더구나 나는 골프를 좋아한다.      

 골프는 나에게 오티움(Otium)이다.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문요한 작가는 오티움을 ‘결과를 떠나 활동 그 자체로 삶에 기쁨과 활기를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설명했다. 오고 가는 이동시간만 생각하면 확실한 시간 도둑이지만, 나에겐 최고의 명약, 심리적 치유제이다.

 

 번아웃을 여러 번 겪고 나니 나만의 해결 방법이 떠오른다. 절대적으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말에는 푹 쉬어야 하는데 최근 3주간은 쉬지 못했다. 그게 이번 번아웃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번아웃에서 빨리 빠져나와 루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부터 버려야 한다. 늪에서 발버둥 치면 더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정도 팬이 달구어져야 고기가 맛있게 구워지듯이, 내 일상에도 예열 구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해야 한다.


 약속이 없는 날을 만들어 보자.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하루를 계획해 보라. 회사에 휴가를 내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었지만, 경영층 보고 일정이 잡혀 불발에 그쳤다. 대신 한 번에 한 가지만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지금껏 글 쓰면서 커피 마시고, 강의 들으면서 독후감 쓰고, 운전하면서 유튜브를 시청하는 게 시간을 버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운전하며 디지털 디톡스를 한다. 독후감을 쓸 때는 강의를 듣지 않는다. 번아웃일 때는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 오롯이 향을 음미하며 커피를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 시간 나는 나에게 마음을 연다.



Key message

1. 기한 독촉에 시달리면 자신감이 상실된다.

기한보다 먼저 마무리 지어라. 완벽주의 성향을 버리고 85점 정도만 되면 제출하라.

기한 내에 85점으로 제출하는 것이 기한 후에 89점으로 제출하는 것보다 낫다.


2. 인풋 과잉에서 벗어나라.

각자의 에너지와 시간을 고려하여 배우고 싶은 것을 선별하라. 다 배울 수는 없다.

우리는 휴식하고 회고하면서 더 성장한다.

머리에 무작정 때려 넣기만 한다고 아웃풋이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


3. ‘어떻게든 해낸다’를 남발하지 마라.

모든 과목을 벼락치기 할 수는 없다.

벼락치기는 한두 과목에서만 승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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