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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죽음과 마주하며)

by 난아

사이렌 소리에 이어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히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되풀이되는 방송에 긴장한다. 만약 잘못 눌러진 것이거나 오작동이라면 한두 번의 방송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벌써 대여섯 번째 방송이 나오고 있다. ‘정말 화재가 난 건가?’ 싶어서 슬리퍼를 신고 문밖으로 나가 본다. 앞집에는 아무도 없는지 조용하다. 하필 엘리베이터 공사 기간이라 작동이 안 되어 더 불안하다. 방송에서는 빨리 대피하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21층이면 옥상으로 대피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일 층으로 내려가야 하나. 엘리베이터가 안 되니 걸어서 일 층까지 가야 하는데 어찌해야 하나 싶다. 끊이지 않는 방송에 불안해하며 뛰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음은 급한데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물며 덜덜 떨리기까지 한다.


부랴부랴 일 층까지 오니 언제 내려 들 왔는지 다 와있는 듯하다. 아직도 방송은 계속되고 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이십여 분을 보내고 있는데 멀리 기술 팀 직원처럼 보이는 이들 둘이 다가온다. 주민 무리들 속 나이 지긋한 아저씨 한 분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오작동이라고 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문을 한 예의 그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빨리빨리 상황을 파악해서 오작동이라고 방송을 하든지 아니면 누구라도 달려와서 주민들에게 말을 해 주어야지 거주자들이 몇십 분씩 불안에 떨며 기다리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만약 진짜 화재였으면 20층 위쪽 사람들은 다 죽었을 거라 한다. 그 말을 듣자 ‘나는 21층인데 그럼 나도 죽을 수 있었겠네’라는 생각이 들며 오싹해진다. 뒤이어 아저씨는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소장 바꿔라 담당자 바꿔라 당장 달려와라 라며 계속 화를 낸다. 주민들이 한 명 두 명 들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 못한다. 소장이든 담당자든 만나서 신속하지 못한 대처에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용기도 없거니와 이미 시간이 삼십여 분이나 지난 후라 성급히 집으로 향한다.


오작동 화재 소동에도 다리를 후들거리며 무서워했던 자신을 돌이켜보자 애써 숨겨놓았던 내 가식과 위선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평소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여기며 인생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인생의 허망함을 알 것 같았고 죽음이 항상 내 곁에 있다 생각하며 의연하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다. 나는 무지했고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더 몰랐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건 피상적 인생 만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생에 대한 나의 오만이 얼마나 컸는지를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소천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얼마나 얄팍한 생각으로 인생을 감히 논하며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죽음을 예측하고 말해 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 우매함과 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내가 아는 세계가 마치 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 착각해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고 제멋대로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여 왔다. 입으로는 관용과 사랑을 읊으면서 정작 가슴은 냉담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누구나 인생의 변곡점에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앞으로의 내 삶의 향방과 깊이를 결정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용히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 마음에 가득 들어차 있는 부질없는 욕심을, 허세와 오만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들여놓고 싶다. 부족한 대로, 섬기는 마음과 낮은 자세를 마음 저장고에 담아본다. (1958자, 10.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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