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비넨호프 전경
서울 덕수궁 경내에 조용히 서 있는 중명전(중명전). 이 건물의 이름을 아는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궁궐의 부속 건물이 아닙니다. 이곳은 우리 민족이 주권을 잃게 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중명전으로 가는 길 입구에 남도식당이라고 추어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아래 링크를 보면 불과 골목을 10M정 도민 더 걸으면 중명전이 나온다. 추어탕집이 비운의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보다 더 유명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저도 남도식당을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에 중명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 남도식당 ] 정동 추어탕집- 30분 넘게 줄 서던 추억.. 전화도 예약도 없는 '정동집'.. 가을에는 추어탕.. : 네이버 블로그
이야기는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제27대 임금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의 건설을 선포했습니다. 동양의 약소국들이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을 지키던 시대, 한국도 당당히 '대한제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한국인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우리도 근대국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제의 한반도 침략 야욕은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자신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노골적인 압박을 시작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에서 한국 근대사 최악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더 이상 독립국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얼마나 비극적이었을까요? 고종 황제는 이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강제로 한국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조약에 서명하게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부 장관 박제순을 비롯한 다섯 명의 대신들이 총칼의 위협 아래 서명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이들을 '을사오적(을사오적)'이라 부르며 영원히 저주할 것입니다.
1907년 초, 덕수궁의 한 방에서 고종 황제는 절망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지 2년, 더 이상 공식적인 외교 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세 명의 밀사를 선택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준(李儁)입니다. 이준은 독립협회 활동가였고, 영어와 국제 정세에 밝은 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설(李相卨)로, 러시아에서 외교 경험을 쌓은 능력 있는 외교관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위종(李瑋種)입니다. 이들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극비리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907년 4월, 세 밀사는 각각 다른 경로로 한반도를 떠났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준은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로, 이상설은 러시아를 통해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은 배와 기차뿐이었습니다. 몇 주에 걸친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 The-K 매거진 202007 Vol.35
그들의 주머니에는 고종이 직접 작성한 밀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대한제국의 주권 침탈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이 적발되면 반역죄로 처형될 수 있는 위험한 문서였습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모이는 국제무대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고종이 노린 장소였습니다.
세 밀사는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공식 대표단이 아니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통감부는 한국의 모든 외교 활동을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밀사들은 호텔에 묵으며 각국 대표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준은 특히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회의장 앞에서 고종의 편지와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문서를 배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국제 여론에 호소하려는 절박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약소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미 국제무대에서 승인받은 강대국이었습니다. 한국의 호소는 외교적 관례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당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일제의 보복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은 한국 밀사들의 활동을 문제 삼았고, 국제회의 운영 위원회에 항의했습니다. 결국 밀사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습니다.
헤이그 평화 회의는 실패했습니다. 세 밀사의 노력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특히 이준의 최후는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을 받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국 순국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습니다.
이상설은 러시아로 망명했고, 이위종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저항의 기록입니다. 세 밀사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목소리를 전하려 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외교 활동은 실패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후대 독립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준의 순국은 한국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동시에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헤이그 밀사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입니다. 국제 사회의 냉정함 속에서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주권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헤이그 밀사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추도입니다.
서울을 방문할 때, 덕수궁을 지날 때, 꼭 중명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조용한 건물 안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저항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중명전에서 우리 역사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교육입니다.
그리고 다음 제가 만든 동영상도 시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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