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우리 가족은 잠시 할아버지 댁에 합가하여 살았다.
할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했기에 내게는 모든 환경이 낯설었고 심지어 나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먼 유치원에 다녔기 때문에 동네 친구를 사귈 기회가 더 없었다.
그때 내게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 집은 한 두 철 읽을 어린이용 전집류를 쉽게 사 줄 만한 형편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몇 권씩 선물 받은 책들을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뒤뜰로 심부름을 간 날,
나는 그곳에서 나지막한 지붕의 회색 콘크리트 창고를 발견했다. 크기로 치자면 컨테이너 박스 두 개 정도, 계단을 대여섯 걸음쯤 내려가야 하는 반지하의 창고였는데 그날 따라 그곳 문이 반쯤 열린 채 안에서 백열전구의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처음 들어 간 그곳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책장이 질서 없이 서 있고 그 모든 칸에는 낡고 빛바래고 표지가 닳은 온갖 문학전집과 도감이며 잡지들이 빼곡했다. 심지어 그 책들의 절반 이상은 포슬포슬한 촉감의 누런 갱지에 세로로 글자가 박혀 있었으니 아마 그 책들은 오래전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내려온 것들 이리라.
책의 절반은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일단 거르고, 그나마 한자가 적은 청소년용 문학전집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주황색 표지의 하드커버에 벽돌색 테이프로 마감된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날로 나의 독서는 서른 페이지짜리 총천연색의 아동용 동화에서 수백 페이지를 넘나드는 활자뿐인 정통 문학으로 하루아침에 건너뛰었는데 일곱 살 유치원생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복잡하고 긴 작품들도 가리지 않았으니 (책이 그것들 뿐이라 가릴 처지가 아니기도 했고) 그건 문학에 대한 감상이나 학습이 아닌 '읽기 놀이'였고, 그 나이에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으므로 딴에는 어린아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적 허영이자 허세였던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 창고의 황홀한 매력은 이후 나의 취향과 놀이의 방식을 지배하여 나는 매일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그 낡고 곰팡내 나던 책들은 내 손 끝에서 서서히 생명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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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으나,
책 창고의 추억은 이후 나의 학습과 삶에 유능한 용병이 되어 뜬금없는 순간마다 불쑥불쑥 끼어들며 나를 도왔다.
글짓기 대회라든가, 역사 공부라든가, 문학에의 몰입이라든가, 인문 사회의 이해는 물론 심지어 수학, 과학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내게 무언가 비교적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면 그 힘은 아마도 그 옛날의 책 창고에서 왔을 것이다.
내 머리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영역의 책들을, 나의 지적 수준에 결코 맞지 않는 다양한 깊이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골라 끝까지 읽는 경험은 나의 관심사를 무한히 넓혀 주었다.
그렇게 얕고 넓게 획득된 낱낱의 지식들은 시간의 파도를 타고 전혀 연관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연결시키며 서로를 뛰어넘고, 빈 틈을 메우고, 또 새롭게 창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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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자유로운 독서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한다.
AR 레벨에 매여 적당한 수준의 책만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교과 내용에 맞춰 평가에 도움 될 책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어른들의 세계를 탐하는 동안 그 안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잘 쓰인 표현과 문장까지 내 것으로 체화하도록.
당장 모든 걸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린이를 위한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만 읽은 아이와 좋은 문장으로 잘 다듬어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본 아이는 그다음 꿈꾸는 세상이 달라짐을 믿으므로.
그렇다면 그 과정을 즐거워하는 아이로 이끌어주는 것이 오직 나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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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책 창고는 제게 보물섬과도 같았어요.
나는 여전히 그곳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