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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버튼 앞 망설인 나, ‘애마’가 던진 불편한 질문

by 천세곡

넷플릭스 ‘애마’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데 멈칫했다. ‘봐도 되나?’ 하는 물음표가 내 손가락을 막아선다.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기분까지 들었다. ‘후방주의’라는 인터넷 밈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었던가. 집에 혼자 있음에도 괜히 뒤통수가 서늘하다.


19세 관람 불가라는 표시가 유독 선명하게 들어왔다. 나는 이미 40대 중반이니 당연히 39세는 훌쩍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마’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무게감이 불러오는 묘한 주저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반응은 단순히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듯싶다. 사실 한국 사회는 유독 ‘성’에 대해 예민하고 보수적이다. 성적인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며, 특히 공적인 공간에서 다뤄지는 것 자체에 큰 불편함을 느낀다.


영화 애마부인 속 주인공 애마는 유부녀다. 외도를 일삼던 남편이 어느 날 과실치사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주변의 만류에도 그녀는 틈틈이 옥바라지를 한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갈등하게 되고, 결국 옛 애인이었던 김문오를 만나 불륜을 저지른다. 또한 우연히 만난 미술학도 동엽과도 사랑을 나누게 된다. 물론 마지막에는 특사로 출감한 남편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하면서 끝이 난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스토리였음에도 끝내 보수적인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군부 독재로 혼란했던 시기, 검열과 통제가 일상인 상황 가운데 스크린에서나마 욕망을 드러낸 시대의 아이콘이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그녀는 억압된 사회가 만들어낸 모순을 꼬집는 상징과 같았다.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시대를 비춘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1980년대 초 한국 영화계를 흔든 애마부인은 단순한 에로 영화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속 여성의 모습은 순종과 억압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번에 넷플릭스가 ‘애마’를 제작했다는 건 단순한 추억 소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거 한국의 금기를 상징했던 이름 ‘애마’. 글로벌 OTT 서비스가 주목했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조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깊은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유독 성에 대해 인색함을 드러내 왔다. 오랜 시간 은밀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특히 여성에 대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성에 관한 이야기가 떳떳하게 공론화되지 못하니 사적인 은밀한 영역에 갇혀 버렸다. 음지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처럼, 불법적으로 왜곡된 모습으로 끔찍하게 변질되기도 했다.


쉬쉬하는 문화가 만들어낸 짙은 그림자가 우리 사회를 더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을 가로막는다. ‘애마’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불편함은 이러한 집단 무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한국 K-콘텐츠는 현재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오징어게임은 계급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아이돌의 위상과 팬덤을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성적 욕망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넷플릭스에서 애마부인을 보게 될 줄이야. 잠시 망설였지만, 한 번 재생 버튼을 누르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주저함 없이 시청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성은 부끄러워하거나 감춰야 하는 영역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에게만 허락된, 종족 번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 쾌락의 도구임을 깨닫게 한다.


재생 버튼 앞에서의 망설임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해 왔다. 욕망은 감춰야 할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담론을 통해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렇기에 넷플릭스가 ‘애마’를 선택한 건 무척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애마’가 글로벌 OTT 무대 위에 올랐다. 욕망의 영역까지 확장한 K-콘텐츠가 세계로부터 어떤 관심을 받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애마' 예고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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