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지.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내가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어서 '인연생 인연멸'이라는 개념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거나, 나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나는 그저 우주의 질서의 일부로서 존재 할 뿐, 일의 성사에 나로 인한 것은 없다. 나는 그저 내 도리를 하면서 이 자리를 지킬 뿐.
이런 생각을 가지면, 오늘 하루 정신없이 매진했던 업무도, 아이디어도 그저 나의 할 도리를 했을 뿐, 여기에 그 이상의 애착이나 자부심, 어떤 공명심 같은 것이 더이상 품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 자리에서 내 눈에 보이는 내 몫의 일을 할 뿐 이 열손가락으로부터 어떤 다른 획기적인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품거나 열정을 품고 매진하는 모든 것들의 괴로움은,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합격했으면 좋겠다, 고득점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겼으면 좋겠다, 내가 고른 식당의 음식이 맛있었으면 좋겠다, 상대방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인정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일상은 초조해진다.
살아오면서 그게 무엇이든, 친구의 마음이든 합격이든 과제든 다이어트든, 성취와 달성에 집착하지 않았던 시절이 한 시절이라도 있었던가.
급기야 삶에는 목표가 있어야 생기가 넘치고, 초조함은 인간이 항상 품고 있는 본연의 감정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왔다.
달성하고 싶은 게 많은 삶이었다. 열정과 이상, 도전과 방황이 가득했다. 이십대에게 주어진 역할을 이십대에 착실히 잘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세상의 질서를 다시금 알게 되고, 이제는 예전처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달성해야 하는 합격이나 점수라는 목표가 없어서 그런지, 수용과 받아들임, 초연함이나 분수와 같은 덕목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쩌면 지금의 이 생각도 나로 인한 것은 아닌 것. 내게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품어지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의 생애주기와 잘 맞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그래서 지금 이 나이의 내가 그 말들에 더 귀기울이게 되는지 모른다.
이십대의 나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분이 주신 소명이나 인연과 같은 믿음과 환상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와 실패 이후에도 삶은 계속될뿐만 아니라 가치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한 이후 성공과 실패라는 관념에서조차 자유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삶의 지평을 넓히다보니 모든 것은 흘러갈 뿐 이라는 지혜에 도달했을지 모른다.
하나의 문 뒤에는 다른 문, 그 뒤에 또 다른 문이 있을 뿐. 이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내 덕분도 아니다. 나의 지금은 나로 인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밤에 두 다리 쭉 펴고 잠도 잘 오고, 하루가 그다지 막막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우주의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그저 파도의 흐름에 따라 춤출 뿐. 여기에 모든 것은 죽는다, 나도 죽고 너도 죽는다 라는 결론까지 더해지면, 나는 정말 자유해진다.
진심으로 생각하는데,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이다. 다람쥐는 별 생각 없이 도토리를 좇는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좇도록 빚어진 존재다. 나는 다람쥐보다는 조금 더 생각하도록 빚어졌지만,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람쥐보다 특별히 더 생각하는 존재라고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람쥐가 그 몫의 하루를 살듯, 나도 내 몫만큼의 하루를 살고 또 하루의 잠을 자면 된다.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