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장에서는, 대형 로펌이나 컨설팅 용역을 맡겨 얻은 산출물이나 오랜 시간동안 구축되고 수정된 체계를 담당자가 잘 숙지한 후, 그래도 해결이 안되는 쟁점을 내게 물어봤다.
예를 들면, 자금세탁방지 규정에 따라 금융회사는 고객확인서를 작성 및 제출하여야 하는데, 전산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별개 법인들의 경우, 그 중 한 법인에서 고객이 고객확인서를 수정하면, 모든 법인들의 그 고객에 대한 고객확인서가 같이 수정된다. 이 경우에도 각 법인들은 같은 고객이라고 하더라도 고객확인서를 별도로 받아야 할지, 아니면 한 법인의 고객확인서 수정 작성으로 모든 법인이 변경된 고객확인서를 사용 및 제출할 수 있을지에 관해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업무만을 주로 하는 담당자로부터 그가 잘 숙지한 실무와 잘 구축된 시스템에 관해 들어 이해하고, 관련 규정까지 담당자를 통해 파악한 후, 쟁점을 검토하면 되었다.
당시엔 그런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판례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고, 법령이나 유권해석은 이런 이례적인 상황을 포섭하지 않고 있었다. 대한민국 금융회사에서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업권에만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별개 법인들의 공동 전산망 사용.
몇년 근무하다 보니, 이런 유사한 쟁점은 반복되었고, 나는 늘 그 자리인데 담당자들은 매년 바뀌곤 하니 같은 질문도 반복되었다. 이제는 히스토리까지 줄줄 말해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게 무척 심심하고, 하는 일에 비해서 내 존재나 입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불만족스런 날들이 많았다. 더욱이 더이상 힘써서 내가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아도 결론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자기성장이 멈춘 것 같았다.
전 직장이 이랬던반면, 이직한 직장은 너무도 다르다. 그럴듯해보이지만 결국은 엉성한 체계 속에서 어떤 부분에 개선이 필요한지 스스로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답을 찾고, 개선을 위해 문제의식이 없는 맨땅에 문제점을 설득해야 한다.
수십년간 지속된 회사에서는, 어라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들면, 곧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 이유를 파악한 후, 대부분 수긍을 했다. 그리고 이상할 수 있지만 관행으로 자리잡은 그 시스템을 이해하고, 관행의 부득이한 사유 및 이를 유지해도 되는 법적 근거를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수년간 지속된 회사에서는, 어라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면, 어떤 과정에서든 다시 그 이상했던 부분을 점검하게 된다.
이런 과정들이 사실은 재미있다.
양껏 일하지 못했던 날들에 비해, 지금은 아주 일에 파묻혀 살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절대 일에 파묻혀는 살지 않을 것이지만.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보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규정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늘 내재하지만, 서른살 서초동 시절부터 나는 알았다. 내 직업은 불안감과 평생 함께 해야 하는 숙명이라는 걸.
그나마 연차가 쌓일수록 '틀렸으면 뭐, 다시하면 되지. 틀려도 괜찮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수정의 기회는 언제든 있다, 그나마 '나'니까 이 정도 바로 잡는 것이지, 일반인들은 어차피 못 잡아내는 일이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된다' 라는 생각으로 뻔뻔해질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