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에세이

쇼펜하우어가 설파한 철학의 핵심은 '맹목적인 의지(Wille)'다.

by 박지숙


마흔이라는 나이는 삶의 중간 지점에 놓인 이정표와 같다. 청춘의 열정과 패기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현실의 무게와 경험의 냉소가 대신하는 시기. 더 이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에 취해 있지 않고, 내가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가질 수 없는지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삶의 민낯을 마주하는 마흔에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날카롭지만 정직한 거울을 내민다. 젊은 날 그를 읽었다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철학자의 넋두리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흔에 다시 만난 쇼펜하우어의 말들은 뼈아픈 진실을 담은 위로가 되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쇼펜하우어가 설파한 철학의 핵심은 '맹목적인 의지(Wille)'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자, 끝없는 욕망의 원천인 의지. 청년 시절, 이 의지는 성공과 사랑, 명예를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마흔에 이르면 깨닫게 된다. 그토록 갈망했던 것들을 손에 넣더라도, 그 만족감은 한순간의 공허함으로 바래고 다시 새로운 갈망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은 고통'이라는 명제가 더 이상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체감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의지가 충족되면 권태가 찾아오고, 의지가 좌절되면 고통이 찾아온다는 그의 말은,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온 마흔에게 소름 끼치는 통찰로 다가온다.


마흔은 흔히 '불혹(不惑)'이라 불리지만, 오히려 수많은 회의와 혼돈에 사로잡히기 쉬운 때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혼돈의 감각을 '환멸(Disillusionment)'이라는 단어로 정확히 짚어낸다. 젊은 날의 낭만적인 환상이 벗겨지고, 세상의 본질적인 비합리성과 부조리를 직시하는 과정. 쇼펜하우어에게 환멸은 비관적인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지혜의 출발점이다. 환멸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덧없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다. 이는 마흔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신적 훈련이다.


그렇다면 이 고통스러운 의지로부터 벗어나 평온을 얻을 방법은 없을까?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의 '구원'을 제시한다. 바로 예술적 경험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예술은 의지의 지배를 잠시 멈추고 순수한 관조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마흔의 삶에서 예술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지친 영혼을 달래는 피난처가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며 잠시나마 의지의 끈을 놓고 평온을 되찾는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연민은 자신만의 고통에 갇혀 있던 시선을 확장하는 행위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존재가 동일한 의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마흔의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각자의 고통을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공감은 이기적인 욕망을 초월하는 힘을 부여한다. 이는 마흔의 나이에 비로소 깊어지는 통찰이자,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성숙한 태도다.


결국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비관주의의 늪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길을 안내한다. 그의 철학은 삶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덧없는 욕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마흔, 삶의 냉정한 진실을 마주한 당신에게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끝없는 욕망에 휘둘려 고통받을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삶의 평온을 찾을 것인가?" 그의 메시지는 삶의 다음 챕터를 열어가는 마흔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필요한 지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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