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처음이 아니어도 울 수 있다는 것은

by 김현정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같은 영화를, 같은 드라마를,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걸 참 싫어했다.

같은 영화를 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서

처음 볼 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고

같은 책을 보면 행간에 있던 작은 쉼표까지도 생각나서

다시 읽기 싫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은 나를 배신하기 시작했다.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며 이런 장면이 있었나 싶고
똑같은 장면에서 울었던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눈물이 났다.
기억은 흐려졌는데 감정은 여전히 선명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드라마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었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다 사랑스럽고
그들의 치열함이, 그들의 유쾌함이 좋았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들이,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어떤 시간의 표정 같아서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산부인과 교과서 첫 장에 나온다는 말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그렇게 나를 눈물짓게 했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이를 낳고 가슴을 졸이며 병원 복도를 서성이던 시간들,
괜찮다는 말 대신 침묵만이 오갔던 밤들,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던 마음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위로받지 못한 마음은 가라앉아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맑은 물아래 잠겨 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냈던 날들이
그 말 하나에 휘저어져 마음 전체를 흐려 놓았다.


우리는 누구나 때때로 불행을 만난다.
예고 없이, 이유 없이.
그 불행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흘려보낼지는 결국 각자의 몫이다.


나는 불행한 일을 만났고, 지금도 가끔 만난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불행이 나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억이 흐려진 대신, 나는 반복해서 울 수 있게 되었고
처음이 아니어도 다시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이해하게 된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깊게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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