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절대 왕정의 몰락

by 녹주고우

오후의 태양은 강렬했다. 파리의 여름도 만만치가 않았다. 딸이 여름휴가차 엄마랑 이곳에 왔으니까, 베르사유 궁전은 워낙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해서 가는 길이 설레었다.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파리의 궁을 그곳으로 옮긴 건 세 번 째였다. 처음 왕실은 콩시에르주리, 두 번째는 루브르 궁이었다.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이 예전에는 궁이었다는 사실, 궁을 옮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은 태양왕 루이 14세였다. 그는 아담한 키에 타이즈 스타킹에 구두를 신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시점으로 보면 흥미롭게 보이지만, 그때의 왕들은 그런 모습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전시된 집채 만한 구두는 태양왕의 구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이전부터 최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과시의 내면에는 불안이 숨어 있다. 어떻게든 주변보다 더 잘나야 했고, 더 화려해야 했다. 그럴수록 깊이는 더 흔들리곤 한다. 균열의 씨앗이 자란다. 지금 당장 백성의 고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방법의 수단이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화려하게 채워지고 있지만 속은 불편했다. 그전에는 평범한 왕의 사냥 별장 정도일 뿐이었다. 그는 궁으로 만들기 위하여 최고의 건축가,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다. 신의 궁전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게 짓게 했다. (1661년~1715년) 성문이 25개. 분수 200개, 방 450개, 넓은 정원, 수로 대칭형 구조로 완벽에 가까웠다. 물공급을 위하여 수력 펌프를 이용했고, 인력은 년간 약 3만 명 투입했다.

이만하면 과시할만했다.


궁전의 화려함과 그림자


황금색 정문 앞에 내렸을 때 규모와 회려함이 압도적이었다. 문은 10만 개의 금박이 덮여 있었다. 모두 백성의 고통이 박혀 있는 듯했다. 왕정을 상징하는 백합과 왕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태양신 아폴론이 새겨져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분노한 백성들은 이곳까지 행진했었고, 황금의 문을 허물어 버렸다. 빵을 달라고 외쳤다. 이 사건을 '베르사유 행진'이라고 부른다.

"말을 타고 있는 저 제 동상은 누구지?" "태양왕 루이 14세." "아하 저분이 이 궁전의 주인이었네, "

들어가는 좌우 양쪽은 왕실 마구간이었다. 마구간의 마부들을 말을 살찌우게 했고, 말똥을 치웠다.


궁 안은 말 그대로 화려했다. 왕과 왕비의 침실부터 각 방들의 천장화의 그림들과 소품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거울의 방에 이르렀을 때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늘어진 샹젤리제는 당시 다이아몬드 가격을 압도했을 정도였고, 한 마을을 통째로 살 정도의 엄청난 값어치라고 했다. 외국 사신들이 오면 이곳 거울의 방으로 초대되었다. 접대의 장소였고, 무도회의 장소였다. 이 궁전은 태양왕과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궁전이었다. 백성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던 곳, 궁전의 아름다움 이면에의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노역, 징병까지 시달렸다. 흉년에 전염병으로 이어졌다. 고통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태양왕의 통치기간 72년, 최고를 누렸지만, 앞날에 대한 예견은 없었던 것 같다. 3대에 걸쳐 절대왕정은 몰락의 징조를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1871년 프랑스와 독일전쟁에서 독일이 이겼을 때 독일황제 빌헬름 1세 즉위식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는 사실, 세상에는 영원한 권력도 내 것으로 남는 것은 없다.


거울의 방에서의 무도회가 열릴 때를 상상해 보았다. 여성들의 철사로 둥글게 부풀린 치마를 입고, 화려한 무도회 장에서 춤을 추다가 화장실 출입은 어떠했을까? 궁전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해결 방법은 궁전 밖의 자연에서 이루어졌다. 악취로 위생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로 인한 전염병이 생겨났을 것이다.


광장의 안쪽 끝에는 황금빛 건축물인 바로크 양식의 베르사유 궁전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누구도 범할 수 없었던 절대왕정의 그곳이었다.

정원 끝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다듬어진 나무 숲과 꽃들이 정돈된 길이었다. 이 길의 노동의 시간을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왔던 길을 걸으며 분수대에 이르렀다. 태양 빛이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말년은 좋지 않았다. 병으로 아들, 손자들까지 잃었다.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유언을 남겼다. "짐은 전쟁을 가볍게 여겼다. 너는 이웃나라와 잘 지내렴,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구나."

자신은 빚을 떠 남기고, 다음 왕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절대 왕정 속에 살았던 루이 14세, 엄청난 공사로 국고는 탕진시켰고, 민심은 잃어갔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한 후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하여 아방궁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와 비슷했다. 백성들의 삶과 무관한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와 사치의 향락을 즐겼다. 그 값은 고스란히 후대의 왕으로 이어졌다.


신분제의 모순에서 깨어나다


루이 14세의 사후, 제1,2 신분이었던 성직자와 귀족들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입지 조건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구 2%에 지나지 않았던 성직자와 귀족들은 프랑스 전체 토지 40%를 차지할 정도로 입지가 굳어졌다. 면세 특권까지 누렸다. 반면 절대 다수인 제3신분인 평민들은 여러 세금과 봉건 의무의 부담까지 지게 되었다. 농민들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경제 파탄에 이르고도 왕정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은 전쟁비용과 미국 독립 전쟁까지 참여했고 제정파탄은 절정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 관료제와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으로 지방의 탐관오리의 횡포로 이어지면서 백성들의 과도한 착취, 고통은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왕은 백성의 고통을 모르는 건지? 외면하고 있는 건지?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봉기나 혁명을 비슷하게 떠올려 보았다.


유럽은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개몽사상의 전파로 낡은 구습을 타파하고 시민의식이 싹터가고 있었다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 절대왕정은 귀족들을 억제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있였다.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지다


레미제라블에서 빵 한 조각의 죗값은 감옥에서의 19년을 살았다. 1789년 루이 16세는 삼부회 소집을 열었다. 그것도 175년 만의 소집이었다. 삼부회를(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 통해서

구멍 난 제정을 해결하려고 했다. 삼부회의 모순된 결과는 제3신분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제3신분은 가만있지 않았다. 국민의회를 구성하였고, 테니스코트 서약으로 제헌 의회를 선포했다. 루이 16세는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1789,7,14 파리시민들이 일어났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딸이랑 파리시내를 걸으며 바스티유 감옥 앞을 지났다. 프랑스혁명의 시작인 그곳을 지나면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순간의 감회를 느꼈다. 프랑스 구체제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시민계급이 등장했다. 자유선언인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프랑스혁명은(1789~)이 일어나자 루이 16세랑 마리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다가 붙잡혀 왔다. 시민들은 단두대에 세웠다. 절대왕정이 몰락이었다. 프랑스혁명은 민주주의 공화정의 시작을 알렸고, 근대시민 사회의 시작을 알렸다.


왕의 절대적 권력이었던 베르사유 궁전은 지금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에 감탄했지만, 그 화려함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궁전의 지어지는 동안 백성들의 고통은 켜켜이 쌓였다. 화려함 뒤에 오는 엄습함은 혁명의 불씨로 남겨져 있었다. 혁명은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은 때가 되면 파멸이라는 교훈을 말해 준다. 지금도 현상은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한 화려함의 여행이 아니라 무게의 깊이로 느껴지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