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풍차
파리에서 3일째, 아침 공기가 제법 익숙해졌다. 익숙해질 때쯤 떠나야 다음을 기약한다. 조식 후 케리어 가방을 챙겨 호텔 로비에 맡겨 놓았다.
지하철을 타고 몽마르트르 가까운 곳에서 내렸다. 몽마르트르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우리는 가까운 쪽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이른 아침이라서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이곳에 오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예술가들의 거리, 낭만의 거리를 보고 싶어서 왔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된다. 다가와서 무언가 요구하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고 했다. 파리의 또 다른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흰색의 사크레쾨르 대성당(1875-1914)이 눈이 부셨다. 외벽이 석회암이라서 하얗게 빛나는 것이라고 했다. 푸른 하늘과 어울림이 우아한 성당의 모습이었다. 로마, 비잔틴 건축양식의 둥근 돔 사이로 푸른색을 띤 두 개의 기마상은 기품을 더하였다. 성당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 (1870-71) 이후 패배의 상처를 씻고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계단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건물은 거의 없고, 대체로 평평한 사이로 딱 몇 개만 허용된 높은 건물, 몽파르나스타워, 노트르담 대성당이 멀리 보였다. 우리나라의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층 빌딩 숲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서울의 아파트 숲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이었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빈민 주택의 상징인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인기 높은 주거환경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연구했고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펴내어 주목을 받았었다.
오래전에 몽마르트르는 외곽지의 빈민가였다.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고지대라서 풍차를 이용하여 생산적인 일들을 했었고, 빨래터가 있었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아지트로 삼았다. 이곳의 여인들이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수잔 발라등은 생계를 위해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르누아르, 로트렉, 드가 같은 당대의 큰 화가의 시선에 머문다. 모델에만 머문 게 아니라 화가들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며 따라 배웠다. 드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이제 관찰자에서 창조자가 되었다. 미술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화가로 되었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사생아를 낳았다. 그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어머니는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림을 가르쳤다. 그는 어머니처럼 어머니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화가가 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몽마르트르의 화가가 되었다. 나는 이 두 화가의 삶을 보면서 몽마르트르의 또 다른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물랑루즈(Moulin Rouge)의 빨간 풍차의 거리로 나왔다. 과거에 유흥가 거리였다는 사실에 썩 유쾌한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이 여행객의 거리이며 물랑루즈 공연을 예약하면 언제든 관람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캉캉춤이 유래가 된 물랑루즈는 카바레 극장이었다. 당시 이곳은 예술가들의 즐겨 찾았던 곳이다. 화려한 불빛을 쫓아 호기심에 찬 부르주아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가난한 여인들도 무대에서 출세의 기회가 있었던 곳, 시인들은 더 이상 귀족들의 시를 쓰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에서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인간의 내면의 욕구를 더 이상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유분방한 삶의 분출이었다. 20c 초 우리나라의 모던보이 예술가들도 사회적 질타를 감수하고라도 자유연애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처럼, 물랑루즈는 엄격한 사회 계층을 천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자유로운 어울림의 공간이었다.
테르트르 광장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곳, 카페와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 하지만 여전히 화가들은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들을 팔거나 초상화를 그려 준다.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이 될 만한 소소한 것들은 골랐다. "엄마, 우리도 그림 하나씩 그려 달라고 할까?" 딸의 제안에 초상화 한 점씩 그리기로 했다. 화가 두 분이서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모델처럼 웃어 보였다. 기분 좋은 설렘이었지만 딸의 그림은 만족했고, 나의 그림은 만족하지 못했다. 화가의 제안에 따르면 나의 묶은 머리로 하지 말고, 풀고 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주겠다고 했다. 기대가 되었다. 완성된 그림은 전혀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원래 대로 할걸, 나는 몽마르트르에서 그린 이 그림을 액자에 넣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아무려면 어떠하냐. 우리가 이곳의 풍경과 호흡하며 만끽했다. 그림 값을 지불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림은 사람에 따라서 만족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19c 후반 이곳 광장에서 고흐, 피카소 등 화가들도 그림을 그렸고, 그림 값을 받고 물감을 사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고흐가 걸었던 몽마르트르의 뒷골목을 걸었다. 그들을 만났고 그림을 만났다. 언제 다시 저 아름다운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볼 수 있으려나, 나는 몇 번을 만난 것처럼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 로비에 맡겨 놓은 짐을 찾고, 오를리 공항으로 향했다. 오후 4시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딸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여행을 야무지게 준비해 준 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딸은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 즐겁다고 했다. 우리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시간이었다. 테르미니역 근처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9시가 넘었다. 숙소가 진짜 로마스러운 옛 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