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의 꼽추와 풍경 에펠탑
루브르 관람 후 오후에는 딸이랑 세느강변을 따라서 시티섬 근처를 걸어보기로 했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는 딸은 운동화를 샀다. 신고 있던 신발이 불편하여 갈아 신었다.
콩코드 광장을 걸으며
광장에는 분수와 조각상들, 이집트에서 온 오벨리스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분수대의 시원한 물줄기가 반짝였다. 우리는 파리의 햇살을 받으면서 걸었다. 콩코드 광장은 과거에 혁명 광장이었고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공포정치 시대에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그중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도 처형되었던 곳, 한때 광기에 찼던 광장이었다. 지금은 화합의 광장이며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역사는 평을 고르면서 지나왔다. 이기심에 찼던 시간을 비워내며 걸어왔다. 눈앞에 마주한 카젤로 개선문, 파리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 웅장한 에투알 개선문도 있지만, 크기가 작은 카젤로 개선문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꼭대기에 네 마리의 말과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병사와 양쪽의 승리의 여신상이다. 이걸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 때 약탈해 왔고,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돌려주었다. 지금 있는 것은 진품이 아니라 새로 만든 것이었다. 사실 이탈리아로 돌아간 진품도 이탈리아가 약탈해 온 것이라고 하니 아이러니한 약탈 전리품들을 떠올리게 된다.
노트르담 대성당
한낮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우리는 시티섬의 퐁네트 다리를 지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이르렀다. 익숙한 성당의 모습이었다. <노트르담의 꼽추> 영화가 떠올랐다. 800년 역사를 담고 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성당이었다. 중세의 고딕 성당이며 지금도 로마카톨릭의 건물로 파리 대주교 성당이라고 한다, 노트르담이란 성모마리아의 성당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이 있었던 곳,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천장의 뾰족한 곡선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창문들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고요하고 엄숙함이 느껴졌다.
1163년~1345년까지 182년 걸쳐서 지어진 성당이었다. 조각상들과 장미 창의 섬세함과 화려함은 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프랑스혁명 때 심하게 파손되었다고 했다. 해체하지 않고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영향이라고 했다. 2019. 4, 성당의 첨탑 부분과 목조지붕이 불타는 모습을 TV에서 보았을 때 무척 놀랐었다. 딸과 여행지에 다녀왔었던 곳, 이후 복원 공사가 이어졌고, 2024년 12월부터 성당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이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종을 치는 종지기 카지모도는 심하게 못생겼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놀림과 조롱을 받았다. 그런 카지모도가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을 때 연민을 느꼈다. 누구 하나 따뜻하게 바라보아준 적이 없는 카지모도, 내면은 순수했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에스메달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집시 소녀였다, 권력과 부조리에 짓밟히고 사회로부터 배척받았다. 이 둘은 사회적 약자이며 편견과 차별 속에 있었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영화에서 희생 양이 된다.
약자를 구원해 주어어야 하는 게 종교가 아니겠는가? 인류를 구원하러 온 중세의 카톨릭은 어디에 숨었나요?
영화는 1400년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성당에서 춤을 추는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와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성직자 프롤로가 에스메랄다에게 욕망을 느껴 종지기 카지노모에게 납치해 오도록 한다. 근위병 페비스에게 들켜서 카지노모는 심한 매를 맞는다. 이때 에스메랄다는 목마른 카지노모에게 물을 건네어주었고, 자신을 구해준 근위병 페비스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페비스도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에스메랄에게 다가선다. 이 모습에 질투심을 느낀 성직자 프롤로는 페비스를 죽인다. 페비스의 죽음을 에스메랄다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교수형에 처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콰지모도는 에스메달라를 지켜내려고 한다. 결국 성직자 프롤로도 콰지모도에 의해 죽게 된다. 모두 비극의 결말을 맡는다. 성직자의 악행이 약자에게 쉽게 누명이 씌워졌다. 마녀재판, 공개처형 등이 여기서 나왔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평등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세의 카톡릭은 부패하였고, 이후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라는 신교가 나오게 된다.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사실적이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낭만주의 기수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정치가였다. 또 다른 소설 <레미제라블>과 함께 오래 남는다.
에펠탑의 비밀
시청 앞에서 72번 시내버스를 탔다.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곤 했다. 우리가 걸었던 길을 돌아서 가는 것 같았다. 에펠탑 근처에서 내렸다. 눈앞에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파리에 있는 게 실감이 났다.
작가 모파상은 철재탑을 흉물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에펠탑 아래 레스토랑에서 친구가 물었다. "그렇게 반대하면서 이곳에서 식사는 왜 해?"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곳은 이곳뿐일세." 당시 에펠탑 주변 사람들도 에펠탑 건설에 반대했고, 대모까지 나섰다. 무너지면 어떡할 거냐, 재산 피해, 인명피해까지 우려했다. 보험사도 거부했다고 한다. 에펠은 어떤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탑 짓는데 개인 자산까지 밀어 넣었다.
파리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1889년 세계 엑스포 만국박람회였다. 유럽에서 박람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식민지 개척 시대였고, 강대국과의 교역을 하려고 최신 상품, 발전된 기계들을 한자리에 내놓는 박람회는 나라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파리 공모전에서 에펠이 내놓은 에펠탑 300m 높이 건축물이 채택되었다. 애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다. 1887,1-1889,3 (2년 5개월 만에 완성) 파리 박람회의 기간 중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구스타파 에펠(1832-1923)
에펠은 처음에는 철로 다리를 짓는 감독이었다. 다리설계, 조립 등 다리를 지을 때마다 성공적이었다. 조립은 식민지에 보내져서 만들어 오게 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들렸다. Bordeaux bridge 1882, 아치교 철교 등 에펠은 '철의 마법사'로 알려졌다. 이 정도면 에펠탑 도전은 해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펠 탑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 안전성, 사업성, 흉물이라는 논란 등 파리의 조화로운 조경까지 망친다고 했다. 당시 파리는 오스만적인 거리 정비를 하고 있었고, 철재탑은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다. 임시 구조물로 지었다가 20년 후 철거 예정이었다. 짓고 보니 파리 송신탑과 라디오 안테나 역할 등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유용해졌다.
오히려 안테나 길이가 30m 더 길어졌다고 한다. 철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게 잠시 파리를 빼앗겼을 때 에펠탑에 나치 깃발이 꽂혀 있었다. 파리 수복 후에는 프랑스 깃발로 바뀌어졌을 때 파리시민들은 환호했다. 에펠탑은 에펠의 집념과 노력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고, 걸어온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지금의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 되었으며 최고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센강의 유람선
어스름 저녁이 되었다. 딸과 유람선 배에 올랐을 때 여행의 마무리가 고요히 젖어들었다. 불빛이 하나 둘, 강변으로 모여들었다. 편안하게 흐르는 물빛에 색감을 풀어놓은 듯 천천히 세느강변을 따라서 방금 마주했던 에펠탑과 옛 고궁 루브르박물관의 찬란함과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까지 유람선에서 마주했다. 아마 파리에서 마주했던 시간들을 오래 추억하라고 다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파리의 아름다운 저녁 풍경에 머물러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딸이랑 테라스 식당에서 생선튀김, 스파케티 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오늘 많이 걸었네. 내일은 몽마르뜨 언덕에 올랐다가 오후에 로마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