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스페인의 국민화가 라몬 카사스(Ramon Casas)의 ‘무도회가 끝난 후‘라는 그림 속 여자는 외출 후 집으로 돌아와 드레스를 입은 채 소파에 누워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 한 팔은 쿠션 뒤로 한 팔은 소파 아래로 손가락마저 늘어뜨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가고 싶지 않은 무도회에 억지로 끌려갔다 왔나? 마음에 둔 남자가 다른 여자하고 춤을 추고 있어 질투심에 화난 마음으로 무도회가 끝나기도 전에 나왔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의 상상을 한참 비켜나 무도회 속 퀸카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춤을 추고 난 뒤 피로감이 밀려왔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집 거실에서 저런 자세로 있어 본 경험이 살면서 한 번쯤은 있을 거다. 세수할 힘도 없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놓아 버린 적 말이다. 격렬한 하루를 보낸 뒤 편안하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필요할 땐 그냥 누워만 있어도 릴랙스가 된다. 요가 수련 시 마지막에 송장 자세로 눈을 감고 있으면 하루가 마무리되고 해방감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몇 년 전 멍때리기 대회라는 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참가자들은 아무것도 않고 그저 멍하니 있으면 된다. 몸의 긴장을 풀고 머릿속 생각을 지우려 한강 고수부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신기하고 이상했지만, 한편으로 멍한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멍때리기를 하고 나면 맥박 심박수는 낮아지고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도 줄어든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춘 듯 보이지만 뇌는 정보를 정리하고 불필요한 것을 지워내고 있다고 한다. 창의력이나 기억력을 높이기 위해서 하루 15분 정도 뇌를 쉬게 하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캠핑을 가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길과 까만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미울 것 하나 없이 편해진다. 비가 오는 날 처마 밑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하교 시간에 갑자기 쏟아진 비를 흠뻑 맞고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주변에 사소한 것에 주의력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많다 보니 숲 멍, 물 멍, 하늘 멍이란 단어가 나오며 자연 속에서 주는 휴식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움츠러 들거나 기를 쓰고 앞으로 나가려 애를 쓰며 산다. 그땐 다 잊고 자연에서 2~3일 쉬는 게 좋다. 그도 저도 여력이 안 된다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나를 위한 15분이라도 만들어 보자.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것처럼 그림 속 여인의 오른손에 작은 책 하나가 들려져 있다. TV나 라디오만 있던 시절에 책을 좋아해 읽으려고 가지고 다녔던, 있어 보이고 싶어 폼으로 가지고 다녔던 지성인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사람들의 필수품이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책을 들고 있는 여인에게 괜히 마음이 끌린다.
안타깝게 도 우리나라 성인 53%가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책 대신 모든 정보를 인터넷이나 유튜브로 습득하다 보니 긴 글을 읽기 싫어하고 심각한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TV 속 영상은 시선을 잡아두며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지만 책은 읽다가도 눈을 돌려 잠시 쉴 수 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주인공과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공감 가는 글에 밑줄을 그어 보기도 하고, 책 속에서 글감을 얻어가기도 한다.
오래전 이시형 박사가 운영하는 힐리언스 선마을이란 곳에서 1박 2일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깊은 산속 오지마을이라 스마트폰과 TV가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건강관리, 행복한 가정생활 대충 이런 교육을 받고 저녁 먹고 나니 오후 7시였다. 땅거미가 지고 난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긴긴밤이 심심해 동료와 산책을 나왔는데 숙소 옆에서 맵싸한 나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교육생들이 모여 장작 속에서 조심히 호일에 감긴 고구마를 꺼내고 있었다. 그날 그들과 함께 먹은 속이 노란 호박 고구마와 조곤조곤 나눈 대화가 두고두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정이 되어 돌아왔으나 잠자리가 바꿔서인지 한동안 잠이 안 와 가져온 책을 읽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모여드는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과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의 서늘함과 가는 여름이 아쉬웠는지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그날 밤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