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살아계신다.

by James

감히 어떤 사람이 신이 살아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을 두고 “살아 있다”고 말하는 일은 이성의 시대에 어리석음처럼 보이기 쉽다. 그래서 대부분은 신을 말할 때 조심스러워한다. 가능성 정도로 남겨 두거나, 상징이나 위안의 언어로 축소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
신은 살아 계신다고.


팀 켈러는 예수를 단순한 도덕 교사나 종교 창시자로 남겨두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예수는 스스로를 그런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용서했고, 안식일의 주인이라 불렸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켈러의 말대로라면, 예수는 거짓말쟁이이거나 미치광이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그가 말한 바로 그 분이어야 한다. 이 선택지 앞에서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애초에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나는 살아 계신 신을 믿는가.
그 이유는 논리만이 아니라 경험 때문이다.


팀 켈러는 『기도』에서 기도를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독백”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과의 관계라고 말한다. 만약 신이 개념에 불과하다면 기도는 명상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계획을 흔들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이유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설득당하고, 때로는 거절당하며, 결국 변화된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격과의 만남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는 신은 편리하지 않다.


그분은 내 생각을 그대로 승인해 주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내가 붙들고 있던 기준을 무너뜨리고, 성공과 안전이라는 우상을 드러내며,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한다. 켈러가 반복해서 말하듯, 십자가는 인간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는 자리다. 신이 살아 있다면, 그리고 사랑이라면, 왜 고난을 선택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기독교는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난 한가운데에서 신의 생명력을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신은 살아 계신다고.

그분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고,
위로의 언어가 아니라 나를 회개로 이끄는 분이며,
침묵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기도 속에서 나를 흔드는 인격이다.

이 주장은 대담하다.


그러나 팀 켈러가 보여주었듯, 기독교는 애초에 대담한 주장 위에 서 있다.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고백,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을 부르신다는 고백. 나는 그 고백이야말로, 이 시대에 여전히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정직한 신앙의 언어라고 믿는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 정말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100%맞다고 해보자 .

근데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내놓는 모든 논리와 이론들이 100% 올바르지 않다고 함에도, 어째서 우리 인간들이 주장하는 무신론 조차 완벽하지 않다는것을 모르는걸까


이해해야한다. 뭐든지 , 이해할수 있을만큼 이해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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