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끄트머리, 주유소에서 일하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재수 삼수 늦은 나이에 수능 보기 하루 전날 예비소집일에 맞춰 가는 길이었다. 왜 하필 '주유소 알 바 모집'이라는 글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수능을 위해 1년은 돈을 벌었고, 1년은 그 돈으로 공부를 했다. 그만큼 나에게 이번 시험은 중요했다.
살면서 엉덩이에 땀띠 나게 공부한 적 있었던가?
재수학원에서 마련한 당구장 바로 위층에 위치한 독서실에서 학원 끝나고 나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공부를 했다. 남학생들은 독서실 올라오는 길에 당구장을 꼭 들렀다. 당구가 끝나면 담배를 한대 피우고 수다를 떨다가 들어왔다. 같은 반에 여학생은 2명. 그중 한 명은 독서실에 오질 않았다. 독서실은 혼자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좋았다. 공부한다고 혼자 오롯 자리를 지킨다는 게 이렇게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고3 때는 왜 몰랐을까?
세상 공짜는 없구나? 특히 나에게는 공짜여야 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능 보러 가는 길에 하필 알 바모 집이 보일게 뭐람. 그래 수능 끝나면 어차피 돈 벌어서 대학가야 하니... 미리 예약 알바를 걸어두고 가지 뭐! 이런 단순함 마음이었으리라.
2차 시험은 엉망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1차 7월에 본 시험을 잘 봤다. 시험 2개 중에서 높은 점수로 가는 제도가 있다니. 94년도 수능 첫 시험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운이 넘치는구나!
다음날 주유소에서 일을 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통통 뛰어가서 주유하고 돈 받고 마무리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저녁밥도 따로 식당에서 줬다. 직원이 많아서 주방 아주머니가 따로 계셔서 밥을 먹는데, 집보다 반찬이 많았다. 그래서 꼭 챙겨 먹고 일을 했다. 사장님도 귀여워해 주셨고, 직원들도 친절하게 알려줘서 일이 힘든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커다란 스타렉스만 한 차가 들어왔다. 매뉴얼대로 했다.
"어서 오세요."
" 휘발유예요? 경유예요?"
" ... "
" 휘발유 맞아요?"
" ... "
"얼마나 넣을까요?
" 가득이요."
" 휘발유 가득 넣겠습니다."
"..."
차 안에 있던 남자는 조수석에 앉은 이쁜 언니랑 떠드느라 물어보는 걸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보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물어봤다. 분명히 휘발유냐고!!! 대답을 한 것도 같다. 네~ 건성이었지만. 그래도 난 내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5만 원입니다."
" 뭐라고요? 이차에 5만 원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예요?"
"휘발유 가득이라고 해서 넣었는데요."
" 경유차에 휘발유를 넣으면 어쩌란 말이야?"
이때부터 반말이다.
경유차에 휘발유? 그럼 내가 잘못 넣었다고? 분명 내가 물어봤는데 그렇다고 대답했잖아.
" 손님이 휘발유 가득 넣겠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했잖아요."
" 언제 내가 휘발유라고 했어?"
이때 주유소 소장님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뛰어나왔다.
"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를 했습니다. 차 시동 끄시고 나오시면 제가 처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제가 생긴 거구나! 큰일인가? 아무거나 넣어서 운전하면 안되는 건가? 소장님은 직원들은 불러서 차를 밀고 카센터에 가야 한다고 했다. 끌고 밀고 가는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친절하던 직원 오빠들이 한마디씩 했다.
" 찻값이 얼마냐? 큰일이다. 네가 여기서 1년은 무보수로 일해도 못 벌 돈 일데... "
소장님이 끌고 간 차는 1시간도 넘게 오질 않았다. 무서웠다. 공포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러움까지 겹쳐 펑펑 눈물이 났다.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이 되었다. 누가 보는 게 대수냐?
1시간이 좀 지나서 그 차가 들어왔다. 차주랑 동행하던 여자도 같이 왔다. 소장님이 다시 경유를 주유하고 돈은 안 받고 오히려 돈을 주는 게 보였다. 그 남자는 툴툴거리면서 운전해서는 휙 가버리는 거다.
" 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얼마를 변상해 드려야 할까요?"
" 놀랐지? 처음엔 이렇게 실수하기도 해. 네가 뭘 변상하니. 앞으론 이런 실수 안 하면 된다."
"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데... 얼마라도..."
" 아니야. 아르바이트하겠다고 와서 변상을 왜 하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전보다 더 눈물이 났다. 고맙고, 죄송하고, 다행이었다.
잠실에 있는 삼화주유소 소장님은 대인배였다.
"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할게요."
콧물, 눈물이 범벅된 얼굴은 가관이었다. 아주 봐줄 수가 없었다. 하도 휴지로 닦아서 벌게진 얼굴이 거울을 안 봤지만 흉했을거다.
한참을 혼자 울고 있는데, 그걸 계속 지켜보던 아이가 있었다. 달래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 몰라 하던 그는 그냥 옆에 있어줬다. 그 아이가 있어서 민망했는데, 외롭지는 않았다.
그날 내가 그렇게 이뻤단다. 우는 게 이쁠게 뭐람. 인연이 되려면 콩깍지가 팍 씌여야 하는데 그날이 그랬나 보다. 난생처음 남자한테 이쁘단 소리를 들었다. 스물한 살! 나이만 들어도 설레는 그때 난 드리어 내인생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누군가에게만 이쁜! 그런 꽃이 활짝 피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유달리 추웠었다. 하지만 우린 그다지 춥게 느끼지 않았다. 평생 옆에서 지켜줄 짝꿍을 만난 거다. 내 인생 처음 이쁘단 소리에 홀랑 넘어가서는 이리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래도 이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다. 고마운 사람.
화양연화(花様年華): 내인생 최초로 이쁨받았던 그시절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