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끝까지 못 하는 사람이 35세에 병원 간 후기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의심은 오래 했다.
대략 이런 자가진단표를 보고, '흠~ 그런 듯도? 아닌 듯도~? 뭐 병까진 아니고 내 성격이 원래 그런 편인 듯?(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했음!)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으니까 괜찮아! 정말 궁금하면 그 때 가서 병원에 가 보자! 검사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 만큼 큰 문제가 내 삶을 후드려패면 그 때 가는 거야!' 생각하고 넘어가기를 반복했다. 꽤나 오래. 여러 해 동안.
병원에서 얘기해 본 적은 한 번 있었다. 거의 십 년 전 얘기. 과호흡으로 일주일에 세 번 응급실에 실려간 뒤 몇 주간 업무는커녕 대문 앞에 나가지도 못하는 심각한 공황장애가 터졌을 때다. 공황장애에 관해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건 다음에.
여튼,하루 2회에 걸쳐 십수 알의 약을 매일 먹던 그 시기에, 이왕 살면서 처음으로 정신과 온 김에 ADHD 진단도 받아 보자 싶어 의사에게 그 얘길 꺼냈다.
의사는 집중의 어려움을 비롯한 기타 증상들은 불안 때문에도 촉발될 수 있으니 ADHD라고 보긴 힘들고, 일단 공황장애 치료에 집중하자고 했다. 뭐 나 같아도 진료 예약을 기다리는 몇 주 동안 죽을까 봐 무서워서 잠도 못 잤다는 심각한 공황 환자한테 ADHD 얘기는 섣불리 안 꺼낼 것 같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이런 자가진단표에 적힌 점들과 내 삶이 꽤 흡사하다고 오래 느껴 왔으며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가 왠지 입에서 안 나왔다. 당장 인생을 힘들게 하는 건 공황이었지 ADHD가 아니기도 했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존나 큰 문제>였던 공황장애가 치료된 지도 몇 년이 흘렀다.
문득, 내 삶에 쭉 있었던 작은 문제를 더는 외면하거나 커버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때가 되니 저절로 동네 병원 초진 예약이 잡아졌다. 물론 내가 스스로 전화했다. 진짜 자동으로 된 건 아니다. 한 달도 기다리지 않았다. 마침 예약이 빠진 날이 있어서 운이 좋았지.
음악을 듣고(너무 긴장됐다) 다리를 미친 듯이 떨며(앞과 동일한 이유. 원래 어릴 때부터 습관이기도 함) 이런저런 문진... 검사... 등을 하고 진료실에 들어가는 순간 의사의 웃는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대략 이런 표정이었다.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 그런 기운이 강하게 왔다. 의사의 첫마디는 "ADHD 공부 많이 하셨죠?"였다. 그 뒤로도 의사가 내 얘기를 들으면서 자꾸 웃길래 나도 흥이 나서 개인적 히스토리를 더더욱 많이 털어놨다.
대강 이런 느낌이었음. 물론 웃음을 주는 사람이 나임.
의사는 그래프를 보여 주며 "어떤 부분이 기준선을 넘어갔고 이는 곧 ADHD임을 의미한다"는 류의 설명을 해 줬다. 더 많은 검사를 원하면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검사(23984만원)도 저런 검사(32948287억원)도 있고, 그 중 하나쯤은 받는 걸 추천하는데, 추가검사를 받든 말든 ADHD는 확실하기 때문에 약은 줄 거라고 정말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왕 확진인 거 다른 검사는 필요없고, 비교적 저렴한 동시에 왠지 대박 과학적이고 신기해 보이는 뇌파 검사를 해 달라고 했다. 뇌파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또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하셨는데요? 혹시 제가 님을 실망시켜 드렸나요?ㅠㅠ 그렇게까지 병적인 뇌파는 아니라 죄송합니다?!?!)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는데, 저 모든 과정이 정말 웃겼다. 정신과 의사를 많이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이 의사는 꽤나 치는 의사다. 첫인상이 극호감이었다. 의사는 꼭 약을 먹고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코멘트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첫 약은 콘서타 27mg으로 시작했다. 다음 주에 갔더니 36mg으로 올린다고 했다. 이렇게 빨리 올려도 되느냐고 했더니 의사는 또 쿨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두 배는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ㅋㅋ" 나도 또 웃었다. 그 다음주에는 45mg으로 올렸고 거기에 안착했다. 여기까진 의사의 처방. 내가 원하면 더 올릴 수도 있고 그건 내 선택이라고 했다. 아직 올릴 필요는 못 느낀다.
콘서타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약물과는 달리, 먹은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약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약을 먹자마자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단 말야?! 나만 빼고?!” 하는 배신감을 표현하곤 한다.
나에게 나타난 믿을 수 없는 효과는 이거였다.
나는 설거지를 한 번에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초딩 때도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이유는 그냥… 저 톡에서 이야기한 대로 질려서 더 하기 싫기 때문이다. 친구의 의문에 대한 답도 적겠다. 남은 설거지는 다른 일 잠깐 하다가 마음이 생기면 다시 와서 하거나, 더 나중에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한다.
설거지로 일단 대표적인 예시를 든 거고, 다른 재미없고 반복적인, 하지만 꼭 해야 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을 앉아서 쭉 해야 하는 상황은 내게 분노(농담이나 과장 아니고 진짜임)와 좌절을 준다. 나는 내 평생 그런 일을 절대 하지 않기 위해서/꼭 해야 한다면 누구보다 빨리 일해서 1빠로 마무리하고 탈출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콘서타를 먹기 시작한 그 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다른 짓을 하지 않고 집안일을 함으로서 하려던 일을 전부 마무리했다>!!!!!
질려서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러 가지 않고, 참고 계속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분노도 느끼지 않고… 정말 별 생각 없이… 무려 한 시간 동안 내 계획대로 재미없는 일을 했다는 얘기다. 이해가 되는가?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런 기분이다. 심지어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황당해서, 의사한테 가서 물어봤다. 혹시 이렇게 한 시간씩이나 쉬지 않고 집안일 하는 게 일반적인가요? 다들 그러고 살아가나요? 선생님도 그러시나요? 의사는 또 웃었다. 참 웃음이 많은 분이라 보기 좋다.
이 황당한 변화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뒤엔 몇 가지 의문이 따랐다.
-왜 이렇게 늦었을까? 왜 여태 내가 좀 이상하다고 자각 못 했을까? (답은 대충 찾았음)
-헐… 그럼 앞으로도 평생 약 먹어야 하는 거임? 약 먹는 것 자체엔 딱히 불만 없지만 평범하게? 일반적으로? 살기 위해선 평생 먹어야 하는 거임? (마찬가지로 대충 답을 찾았음)
-나는 좀 특기할 만하게 약빨이 잘 받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임?!?! 혹시 나 오진받아서 고의성 없이 약을 남용 중인 거 아님?!?! (상기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함)
보다시피 대부분 답을 찾았다-혹은 앞으로 답을 찾아갈 길잡이가 될 법한 이정표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그런 기록을 남겨 볼까 한다.
late diagnosed ADHD 친구 여러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