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전체를 에바적으로 반추하다
지난 글에서 말했다시피, 늦은 ADHD 확진 sunbaenim들과 마찬가지로 약을 먹자마자 놀라운 경험을 했다. <한 시간 동안 다른 일 안 하고 집안일 하기> 가능. <강한 분노와 짜증을 느끼지 않음>이라는 서비스까지 왔다.
본인 인증 및 수많은 자잘한 체크-단계를 거쳐야 하며 한 번이라도 삑사리가 나면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하는 인터넷상의 돈/세금관련업무 역시 내가 새롭게 할 수 있게 된 일 중 하나다.
(돈 문제로 인터넷으로 뭐 인증받아서 하는 거 다들 귀찮고 짜증나시는 거 압니다. 실수로 그 일을 제때 못 할 수도 있죠. 저처럼 ‘문제 있는 놈들’은 뭐가 다르냐… 진심 키보드로 샷건갈기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종래에는 그게 너무 싫으니까 그 일을 피하고 미루길 반복하다가 실제 삶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계속된다는 거죠. 그러다가 약 먹으면 ‘수행 가능 상태’가 됩니다.)
약을 먹는 것만으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릴> 수 있게 된 거다. 이건 아마 해당 문제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뭔 소린지 갈피를 못 잡을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일-결코 어렵지는 않지만 살짝 귀찮은 일,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앉아 있다 보면 결국 다 할 수 있는 일, 재미없고 반복적이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무슨 요일에, 언제쯤 시간이 나면 하겠다고 계획하는 게 의미가 있어진 거다. <특정 시간에 그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뒤 실행하기>가 가능해졌다.
말도 안 된다. 충격적인 혁신이다!!!!!!
다이어리를 예로 들어 보겠다.
공부하는 학생들 많이 쓸 것 같은 타임트래킹 스케줄러. 이건 진짜 내가 죽어도 쓸 수 없는 거다. 시도를 안 해 봤다는 얘기가 아니다. 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ADHD를 위한 다이어리 정리 기법. 불렛저널 템플릿. 안 찾아본 게 없고 안 해 본 게 없다.
저따위 것을 쓰려고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좌절이 쌓였다. 저딴 거 해 봐야 중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빠지고, 그러면 수많은 시간이 날아가고, 그렇게 날아간 시간은 하나하나 기록할수록 민망해진다. 정말 많은 시간을... 그렇게 날리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을 전부 그대로 적는다? 그럼 하려던 일은 하나도 안 하고 오직 개쓰잘데기없는 일만을 하기 위해 하루를 대부분 날렸고, 매일 그런 하루를 반복했다는 사실이 시각화된다. 안 하면 진짜 큰 문제인 업무과제가 눈앞에 있는데도. 다이어리 쓸수록 그냥 내 자신이 폐급이란 사실만 확인하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면 걍 깨닫는다.
아 애초부터 난 저딴거 쓰면 안되는구나!
그렇게 좌절과 포기가 수없이 반복됐다.
이런 건 좀 낫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쓰다 보면 좌절이 쌓인다. 저런 거 완벽하게 쓰는 사람 어디 있겠냐 싶겠지만... 물론 그 말도 맞다는 걸 알지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 수 있다. 나는 <일반인 수준>이 아니고 <폐급 수준>이라는 사실을.
학생 시절엔 성적만 나오면 되니까 할 만했지만, 나이가 들고 현대인의 삶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들이 많아질수록 실패 하나하나가 더 치명적이 됐다. 더 많은 좌절이 더 자주 반복됐다.
하도 일일 과제 실행이 안 돼서 나중엔 <집안일 손끝이라도 대기> 이딴 것도 목표라고 썼다. <책 펼치기 행위만 하기>도 목표였다. 그런 목표도 잘 실행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니 그렇게까지 문제가 있는데 왜 그 나이까지 몰랐냐?
알고 계셨나요?
(더는 그게 불가능한 시점이 오기 전까진!)
(노파심에 미리 적는다. 당신이 할 일을 못 하는 이유가 무조건 ADHD 때문이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수많은 병 혹은 장애-disorder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겠지?-의 증상이기도 하다. 하려던 일 못 한다고 진단 없이 약을 무작정 구하려고 들면 안 된다. 전문가의 진단이 먼저다. 하려던 일 못 한 게 그냥 그 날 기분 상하고 마는 건지, 장기적으로 반복되며 당신 인생에 객관적으로 큰 문제를 초래하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는 과정도 선행돼야 한다.)
약을 먹고 폐급인생에서 벗어난 직후, 나는 모든 늦은 ADHD 진단을 받은 선배님들이 했던 행위를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혹시 내 삶이 엄청나게 다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내가 학생 때 조금이라도 앉아서 공부라는 행위를 할 수만 있었어도. 인생 전체에 걸쳐 단 한 가지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있었어도. 싫은 일을 조금만 더 할 수 있었어도. 내가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있었어도. 뭔가 진짜 달랐을 것 같은데! 이런 의미 없는 슬픔. 누가 뺏어간 적도 없는데 뭔가 잃은 것 같은 상실감.
단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헐 이것도 혹시?" 하는 호기심 반, "하 이게 뭔가 이상한 조짐이란 걸 알았다면..." 하는 쓰잘데기없는, 후회 그 자체를 위한 후회 반. 뭐 그런 마음에서 하는 짓거리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분명 궁금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 어릴 때 A였는데/나 지금 B인데, 이것도 혹시 내가 ADHD라는 증거?!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분들이 읽으면 흥미로워하겠다 싶어 당시 사고과정을 그대로 적어 보겠다.
또 노파심에 미리 적는다. 누군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ADHD의 '증거'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진단을 받은 후 한 달간 전문지식 없는 내 머릿속으로 흘러간 생각-반추를 정리해서 적은 거다. 의사한테 얘기한 뒤로 저런 생각 다 털었다. 더이상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 쓰는 거다.
1) 미취학아동 시절
엄마가 옛날 얘기를 해 줬었다. 18개월부터 글을 읽었는데, 자꾸 잠을 안 자고 밤새워 책만 읽어서 집에 있는 책을 전부 다락에 숨겨야 했다고. 그 뒤로도 옆집 아주머니가 옆집 동갑 애랑 놀라고 불렀더니 거기서도 책만 읽다가 쫓겨났고, 길 가다가도 모르는 유치원에 들어가서 책 읽으며 쟨 뭐냐 소리 듣고(정말 황당할 따름이다 미친놈), 동네 작은 영세 서점에서도 앉아서 끝없이 책만 읽다가 쫓겨났댄다. 내 5세 시절 기억에 몰래 불 켜 놓고 책 읽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들은 순간이 있는 걸로 봐서 다 과장 없는 실화인 것 같다.
그래서 3살 무렵부터 매 주말마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종로의 영풍문고와 교보문고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전통은 초등학생 때까지 계속됐다. 거기 가면 책 읽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 쪼끄만 놈이 지 키만큼 책을 쌓아 가면서 읽고 있으니 방송국에서도 와서 찍어 가고, 서점에서 일하는 언니랑도 친해져서 가끔 특혜를 받는 좋은 일도 있고, 뭐 그랬다.
당시 부모님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겠지만... 헐 애가 똑똑하네요~책을 참 좋아하네요~ 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저거 좀 심상치 않은 놈이다. 살짝 이상하다. 글의 세계 속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게 아니고 그냥 중독된 놈이다.
2) 생각해 보니까 난 수업을 들은 적 없어...
나는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다. ADHD 중 정말 눈에 띄는, 전형적인, '하이퍼한 행동' 보이는 타입도 아니다. 내가 ADHD가 의심된다고 말한 사람은 딱 하나 있다. 35년 인생에 유일했다. (그 녀석은 서른이 넘어서 친구가 된 레전드 ADHD 녀석이다.)
이유는 대충 짐작간다. 내가 <원하는 것엔 전혀 집중 '못' 함-내가 원하는 것에 과몰입함>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하이퍼 계열이 아니다.
내 학창 시절을 더 솔직하게 적어 보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영재로 분류되는 아동이었고... 중학생 때까지 학교 수업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판단 가능했다. 고3 때 공부를 손에서 놨어도(진로를 수능 점수가 필요없는 쪽으로 크게 틀었음) 수능은 언수외 111 무난하게 나오는 정도였다.
그래서 수업 시간 안 듣고 뭘 했느냐? 주로 이런 활동을 했다: 팬픽 읽기. 팬픽 쓰기. 전자사전에 들어 있는 열 가지 미니게임 섭렵하기. 사회과학서적 읽기. 영화비평 읽기(영화는 자습시간에 인강실 가서 보면 됨). 신문잡지 읽기. 등등등등.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저런 성적? 자랑거리 못 되는 거 안다. 세상에 더 머리 좋은 애들 널린 거 옛날부터 잘 알았으니까 추가적으로 알려 줄 필요 없다. 저런 상황이었어서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고, 나아가서 '내 수업 태도가 다른 애들에 비해 딸린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다. 수업을 안 듣는 행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 적 없고,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만약 쫌 맘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와도 내가 듣기 싫어서 안 들은 거니까 상관 없다고 정신승리 갈겼다. 주여.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진짜 상태>에 대해 꼭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신승리 내려놓고요.
3) 수업 안 들은 거 아니야... 못 듣는 거야...
저 시절엔 아주 희미~~~하게 의심했다. 나 기면증 아냐? 하고. 진짜 너무 잘 잤기 때문에.
자, 나의 특징은 이거다.
(1) 소리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인식하는 데 정말 취약하고 (한때는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잘 못 듣는 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나 귀 진짜 안 좋아"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다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청력 자체에는 문제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2) 수업 내용이 내 관심 토픽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심각하게 흥미를 잃는다.
당연히 문제가 된 적 있다. 고딩 때, 대충 평소실력으로 비비기가 가능했던 언수외와 달리 많은 암기가 요구되는 사탐 과목은 점수가 들쭉날쭉했다. 진짜 암기에 취약했다.
딱 한 번, 나름 좋아해서 점수 잘 받고 싶었던 국사 과목 인강을 구입해 봤다. ㅅㅂ 단 한 강의도 끝까지 제정신으로 들어 본 적이 없다. 쫌만 재미없어지면 잔다. 나도 내 자신이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난 역사 자체는 정말 좋아하는데도.
결국 인강도 포기했다. 교단에서(혹은 화면 속에서) 교사가 수업하는 시간=뭘 읽는 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선 같은 의미로 등치됐다. 그게 통했다.
진단 받고 나서 생각했다. 시발 그게 통해서 문제였구나... 그게 안 통했으면 문제가 있다는 걸 그 때 알았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저도 십년넘게 애들 가르치는 입장에서 뒤늦게나마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수업 안 들은 거 아니고 못 들은 겁니다. 선처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저런 사유로 내가 간과한 사실. 내가 수업을 안 듣기를 택한 게 아니라 <못 듣는다>는 것.
4) 주변정리?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잦은 시험 실수? 말할 가치조차 없음
뇌 발달 지연으로 인해 충동 조절 못 하고 사회 윤리/통념을 거스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도 ADHD의 대표적 증상이라고 한다. 중학교 입학 이전까지 그런 짓 꽤나 했지만 문제가 된 적 없다. 전부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게 했다. 진심 대가리에 힘주면서 참다가 안 들킬 때를 기다려서 했던 기억이 난다. ADHD의 A도 없어 보이는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그런 적 없다고 했다. 그런 충동도 느낀 적 없다고 했다. 여전히 반쯤 의심 중이다. 구라 아냐?
선생님들한테 반항도 좀 했다. 선생님들한테 소리도 질렀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래도 혼나거나 문제아 된 적 없다. 뒤늦게 돌이켜 보니 공부 잘 해서 익스큐즈해 주기로 합의보신 것 같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진심입니다.)
내 초등학생 시절 사물함은 레전드 쓰레기장이었다. 학기가 끝나는 날이면 사라졌던 모든 물건이 거기서 나왔다. 걸레짝이 된 학교 상장... 왜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쓰레기... 등도 포함이다. 다른 애들이 책가방에 짐 넣어서 갈 때 나는 여러 개의 쇼핑백을 동원해 대체 어디서 왔으며 왜 여기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을 쑤셔넣어야 했다. 졸라 무거웠다. 그래도 이겨냈죠?
고등학생 때는 오렌지 주스를 술로 만들었던 추억이 있다. 먹다 만 주스를 사물함에 넣어 두고 한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한 학기(혹은 두 학기?)가 지났더니 주스에서 술 냄새가 났다. 너무 신기해서 애들한테 여기서 술냄새 난다고 맡아 보라고 엄청 들이대고 다녔다. 의사한테 이 얘기 해 줬더니 흐느끼면서 책상에 엎드림.
시험 실수? 말하면 입 아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 실수 많이 하는 거 알았다. 상기했듯, 특히 영어와 수학은 학교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는데, 막상 학교 시험 보면 백점이 잘 안 나왔다. 아마 거의 안 나왔을 거다. 실수는 반드시! 무조건! 하게 돼 있으니까.
경시대회 문제가 어려울수록 나한테 유리하다는 것도 초3때 이미 알았다. 문제가 쉽고 평균이 높으면 모두 비슷하게 높은 점수를 받지만, 어려우면 다 똑같이 어느 정도 틀리고 들어가서 어려운 문제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내 학창 시절 히스토리.
아주 오랫동안 ADHD를 의심했지만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다. '고기능 ADHD' 자체가 민망한 말 같아서 피했다. 내가 위에 줄줄이 적은 것처럼, 나 공부 안 했는데도 머리 좋아서 잘 했다고 자랑하는 놈 같으니까. 자랑할 거리가 없어서 오십 먹을 때까지 수능 성적 자랑하는 놈 같고. 걍 내가 싫은 일 별로 안 하고 싶어하는 성격인데 변명하는 말 같고. 으. (근데 그 짓 하고 있죠?)
결론부터. 고기능 ADHD란 정식 의학용어는 아니며, 어떤 부류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다. 어떤 부류냐?
'고지능'이 아니라 '고기능'이다. 'high-functioning'이다. 이 부분부터 유념해야 한다. 머리가 좋고, 성적이 좋고, 이런 개념이 아니다. 일상 속 과제를 잘 수행하느냐 하는 개념이다. 그게 펑션이다. '고기능 우울증' '고기능 자폐' '고기능 불안' '고기능 싸이코패스' 등 많은 말이 존재한다. 물론 머리가 좋으면 본인 나름의 전략을 더 잘 마련할 수 있으니, 지능과 기능이 어느 정도 상관 있다. 학생 시절엔, 특히 한국에선, 오직 성적만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에 더 비슷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나 때는 더 그랬음!)
ADHD가 있는데 왜 기능이 가능한가? 몇몇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증상이 비교적 심하지 않아서 일상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은 안 끼침.
증상 때문에 떨어지는 기능을 카바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발달시킴.
혹은 실제로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 기능이 훌륭함.
그런 '고기능'들에게선 어떤 증상이 보이는가? 대략 이렇다고 한다.
시간 약속/정해진 날짜 까먹음/잘 못 지킴.
업무를 영원히 미룸.
오랫동안 앉아 있기 힘들어 함.
집중력을 쉽게 잃음. 쓰잘데기없는 것으로 관심이 쉽게 돌아감.
일 마무리를 잘 못 함.
자존감에 문제 있음.
(다 어디서 들어 본 말임... 굉장히 뻔함... 그래서 예전에도 저런 거 보고 무시했음... 근데 생각해 보니까 다 진짜였음... 무시할 게 아니었음...)
고기능 ADHD(혹은 아직 진단받지 않았지만 그렇게 추정되는) 인간들이 보통 하는 말: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별 문제 없었고, 벼락치기로 커버 가능했고, 대학까지도 어느 정도 됐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잘난 척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다.
글 맨 위에서 '좌절' 에 대해 썼다. 이게 학생 때는 덜하다. 성적만 나오면 큰 문제 안 된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면 일상 속 업무가 정말 많아진다. 누가 나한테 밥도 안 차려 주고, 집안일도 더 해야 되고, 뭔 세금 신고 이런 것도 해야 되고.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나만 할 수 있고. 살면 살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가고.
시간이 지나, 다소 늦게 알게 된다. 내가 계속 실패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실패의 경험이 쌓인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은 시간이 지나며 '내가 보는 내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먹는다. 나는 진짜 자기관리 못 하는 폐급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다.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될까 하는 불안 혹은 슬픔 혹은 둘 다가 쌓여 간다. 옛날엔 문제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는 막막함, 실체 없는 후회도 밀려온다. ADHD가 다른 문제, 대표적으로 우울장애 혹은 불안장애와 함께 있기 쉬운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인생 반추를 하며 내 인생의 퍼즐을 맞춰 가는 시간을 가졌다. 자꾸 같은 생각으로 돌아갔다.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아까워하고 '아니 이것도 혹시? 근데 왜 몰랐지?' 하고 반추하며 생각하는 행위 자체에 좀 빠졌다. 그러다 이 영상을 봤다. 굉장히 짧은 쇼츠인데 인상깊어서 캡처해 뒀다.
'grieve'가 정확한 표현 맞다. 나만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고, 일반적인 반응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고 나니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사는 거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 나는 딱히 특별하지 않다. 일반적이다! 계속 이렇게 슬퍼할 거리를 찾아서 일부러 슬퍼할 필요 없지 않나? 애초부터 잃어버린 적도 없고 다시 찾을 수도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나? 물론 한때는 그럴 필요가 있지만, 계속 그러면 곤란하겠지? 계속 이러는 건 'ADHD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기'에 중독되는 거겠지?
의사에게도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히스토리를 이야기했다. 의사는 전부 들어 줬고(꽤나 웃음이 많은 양반이었다. 제가 그렇게 우습나요?) 좋은 말도 많이 해 줬다. 인상적인 말만 적어 보겠다.
모든 것을 ADHD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무조건 ADHD 특성이라고 볼 필요 없다.
모든 행동을 설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어떤 부분은 너의 성격 그 자체다.
정말 도움이 됐다. 이래서 전문가인가 보다. 리스펙. 또 이런 말도 해 줬다.
약은 실행의 일부 기능에만 도움을 주는 거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성숙해 간다.
나이가 들수록 내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 가는 거라고 했다. 40대에도, 50대에도. 덕분에 대충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앞으로 또 실패하는 날이 와도, 마음에 안 드는 내 단점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돌아와도, 그걸 수용하고 살아갈 방법 자체를 찾아야겠구나. 계속 배워 가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해졌다.
요새 ADHD를 설명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직역하자면 '신경 다양성'이다. 자폐, 난독증 등도 이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뇌가 돌아가는 꼴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거다. 성인 ADHD는 'cure'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인 거라고 했다. 애초부터 ADHD의 D는 'disorder'다.
나의 문제를 이런 구체적인 언어로 보고 생각한 것도 도움이 됐다. 나를 설명할 언어가 있다는 사실이 내 자신을 수용하게 해 줬다. 반추를 시작하기 전에, 위에 이렇게 썼다. 이런 반추가 더는 나한테 큰 의미가 없다고.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내가 <근본적 문제>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받아들였으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고 수용했다.
어느 순간에는 분명 이런 반추가 나한테 의미가 있었다. 진단받은 사람, 혹은 의심 중이지만 진단받아 보지 않은 사람 중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길게 썼다.
앞으로의 글은 수용하는 방법,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실질적 대책(정신적인 부분과 실행하는 부분 모두 포함해서)에 대한 얘기가 되겠지 싶다. 그러다 심심하면 언젠가 또 반추할 수도 있다. 오래 빠져 있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헐 이거쓰다가 시간 너무 많이 갔음 나 빨리 나가봐야됨
다음 글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