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2025)

이게 삶이래. 느껴

by 양성현



기예르모 델 토로 할배가 출산을 추천하다

제일 먼저 든 생각. 음, 출산 장려 영화였네! 어머니와 그의 자식 예수가 서로 용서함으로서 온전해졌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조금 더 길게 적자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함으로서 나 자신까지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는 여정. 엄청 아름다움. 애를 낳아 보면 언젠가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정도. 델 토로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런 쪼로 말한 바 있다.


"죽음의 부재 속에서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 살아 있는 한 행복이 가득한" 이라고.


이게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다. 최종부에서 극적인 용서와 수용을 해 버리는 빅터와 피조물.


어둠에 다크

소설의 결말은 전혀 다르다. 두 인물을 기다리던 건 '삶'이나 '행복'이 아니다. 빅터는 마지막까지 괴물을 '적이자 가해자'로 여긴다. 비록 '증오와 극렬한 복수심'은 전만 못해도 여전히 '적의 죽음을 바라는 내 마음은 정당'하며, '그를 죽이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끝까지 선장에게 '내가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달라고' 부탁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해 그의 죽음을 본 피조물은 긴 독백을 통해 일생 품었던 고통, 연민, 자기 혐오, 분노, 복수심, 본성이 되고 만 악함, 후회를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동시에 분노한다. 고통과 정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의 길은 곧 죽음이다. (물론 그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얼음 뗏목에 올라'타서 '세찬 파도에 떠밀려 어둠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 간다고만 묘사된다.)

Bernie Wrightson's Illustration, 1983

『프랑켄슈타인』이 이백년 전, 19세기 초반 유럽에서 쓰인 소설임을 떠올려 보자. 절대적 이성을 등불삼아 발전하는 과학, 계몽주의적 합리주의가 약진하던 때다. 그 흐름에 반발해 자연이라는 거대한 실체, 신비롭고 선한 것을 숭고히 여기는 낭만주의 역시 대두됐다.


빅터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그 성취가 가져올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치도, 기대와 다른 결과를 책임지지도 못한 인물이다. 그 시대 자체의 상징. 한편 피조물은 비극적인 운명에 분노하고 싸우고 답을 찾으며 성장해 가는 이름도 없고 인간도 아닌 무언가-it-어쩌면 자연 그 자체다.


둘은 과학과 순수함,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서로를 증오하는 대립항이며, 바로 그렇기에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이기도 하다. 둘은 의식과 무의식이며 주인과 분신이다. (더 나아간 해석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언급하겠다.)


이런 『프랑켄슈타인』에 사로잡힌 유년기를 보낸 델 토로는, 인터뷰에서 "평생 메리 셸리의 작품과 함께 살아왔으며", 그에게 "성경과도 같았던" 작품이라 언급하며 이런 의도를 밝혔다.

But I wanted to make it my own, to sing it back in a different key with a different emotion.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다른 감정을 담아, 다른 조로 다시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델 토로가 창조한 괴물
For me, only monsters hold the secrets I long for.


내가 갈망하는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은 괴물들뿐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충분히 짐작 가능하듯, 델 토로는 괴물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괴물은 오히려 '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수많은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 가까워 보인다. 고통받고 배우고 성장하며 머리카락이 자라날수록 점점 인간처럼 보인다. 그가 괴물로 재현되지 않는다는 건, '누가 괴물인가' 류의 해석이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괴물이 빅터에게 '네가 괴물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괴물 애호가 델 토로가 왜 '최애' 작품의 괴물을 괴물이 아니게 만들었을까? 그가 비튼 결말은 실제로 호불호가 꽤 갈렸다. 그도 예상했을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두 인물이 내재한/선택한 폭력, 악함, 자기 혐오, 끝내 누구에게도 용서받거나 이해받지 못한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한다는 것일 테니까. 이런 거대한 변형을 취하면 원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 버리니까.


대체, 그의 안에서 빅터와 괴물이 무엇이었기에? 혹은 그들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에 대해 적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쓰면서 생각했고, 조사했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에 띄는 건, 빅터의 유년기에 부여된 뚜렷한 색채의 메타포다.


그의 옆에는 늘 죽음을 암시하는 검은색, 실재하는 죽음의 붉은색, 그리고 생명과 탄생의 흰색이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저승사자처럼 등장한 그의 아버지는 죽음을 불러오는 자, 그 자체다. 붉은 옷을 입은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위해 짐승의 붉은 피를 먹기를 강요받다가 붉은 핏자국을 남기고 죽는다. 어머니-아버지, 삶-죽음은 노골적인 색의 은유를 통해 서로 대립하는 상징으로 고정된다.


처음부터 어머니에게 드리워 있던 붉은 죽음의 베일.
의도가 분명한, 모든 구획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 색채의 사용.

빅터는 저명한 의사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을 납득할 수 없기에 경위를 의심한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물어 '누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없다'는 답을 받은 뒤에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단순하며 그렇기에 납득하기 힘들다. 죽음에 이유란 없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빅터는 '죽음을 정복하겠다'고 선언한다. 검은 옷을 입은 아버지로 동치되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도망가고자 한다.


생명을 낳음을 상징하는 흰 우유 / 늘 그를 덮고 있는 죽음의 붉은 담요

명확히 하자. 그가 원하는 건 '정복'이 아니다. 그가 원한 건 죽음으로부터 안전해지는 감각이고, 정복이 아니라 도망이라 표현해야 한다. (사실 정복이란 것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흰 우유를 마신다고 도망갈 수 없다. 그는 계속 붉은 담요를 덮고 자며 죽음을 가져오는 천사의 환영에 시달린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산후우울증에 걸리다 :

"창조 이후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 출산 대비는 미리미리!

마침내 탄생한 피조물을 마주한 그는 환희에 찬다. 붉은 가죽 장갑을 벗어던지고 괴물에게 서로의 손이 같은 모양임을 확인시켜 준다.태양, 빛, 햇볕, 생명, 온기를 알려 준다. 두 팔을 벌리고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 주는 동시에, 그것이 불러 주는 '빅터'라는 이름을 들으며 그것의 품에 안겨 안정을 찾는다.


이 순간 그는 마치 갓 아이를 낳은 다정한 어머니 같다. 그는 괴물에게 뜨거운 것, 조심해야 할 것, 걷는 법을 알려 준다. 계속 웃고 있다. 그러나 아름답고 따뜻한 햇볕에 대해 알려 준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괴물을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가둔다. (그 와중 몸을 따뜻하게 할 담요는 덮어 준다.)


그 뒤 급격한 감정기복이 찾아온다. 그것의 이름은 산후우울증이다. 그는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진짜 준비는 전혀 되지 않았던 거다. 그는 말한다.


녀석은 빠르게 강해져 갔지만 난 쇠약해졌죠.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언어나 발달은 없었어요.


'자식의 성장이 내 생명을 빼앗는다'는 발화는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어머니에게 걸맞다. 전통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빅토르는 그의 기대만큼 영특하지 못한(적어도 당장은) 괴물의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고 상처를 돌보며, 그 행위의 고달픔을 탄식한다. 그가 아버지와 죽음이란 이름으로부터 줄곧 도망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생명을 낳은 어머니 되기.


게다가 이 녀석은 기대만큼 아름답고 영특하지도 못했다.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빅터'밖에 없다. (엘리자베스가 "당분간 그 단어가 세계의 전부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빅터는 개씹는다. 우울이란 게 그렇다. 본인의 슬픔과 절망의 늪에 빠져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귀에 안 들어온다.)


잠시 경이와 환희를 줬던,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얻고 싶어했던 '자식'은 증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는 피조물을 짐승이라 부르며 학대하고, 그가 지성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고, 그가 정말 순수한 존재일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이제 모자란 자식의 존재는 빅토르 자신의 실패, 그 자체다


이 과정에서 오스카 아이작의 연기는 줄곧 히스테릭하다. 이유 없는 분노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지나치게 격앙된 감정과 과장된 반응을 뜻하는 '히스테리'가 한때 병리적으로 여성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였음을 기억하자. 여성의 자궁이 그 원인이라 했던 사람도 있고, 남근의 부재가 원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원작자, 메리 셸리

빅터가 엄마가 되고 싶어했다/됐다는 것은 기예르모의 독자적 해석이 아니고, 나만의 해석도 아니다.


출간 당시, 작가가 여성임이 알려진 순간 작품에 대한 평도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여자의 병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괴한 작품'이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감히 어린 여자가 '남성적'이며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과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과학에 집착하는 세태를 비판했다는 괘씸함이 혹평을 부채질했으리라.


물론 남자만 글을 읽는 건 아니었다. 글의 첫머리에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의식과 무의식, 주인과 분신...'이라는 일반적 해석을 적었다. 이를 넘어 여성 작가의 존재를 매개한 해석 역시 등장했다. 그 중 하나는 빅터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거해, 고유 영역인 임신과 출산의 기능을 가로채고 단독으로 후손을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적 남성의 욕망이나 음모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가 겪는 고통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경험-출산, 돌봄 노동의 고됨, 산후우울증-이 반영된 것임 역시 기존 『프랑켄슈타인』 페미니즘 비평의 한 갈래임을 참고할 수 있겠다.



감독과 인물: 누가 창조주인가?

재밌는 건, 이 두 가지-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산후의 고통이 감독 본인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거다.


어릴 적 겪은 죽음 트라우마-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빅터의 유년기를 지배하는 이 감각이 감독의 어릴 적 경험에 기반함을 언급하는 인터뷰가 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매우 불안정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밤 내게 인사하며 "내가 내일도 여기 있길 기도하자"고 하셨다. 네다섯 살배기가 듣기엔 꽤 강렬한 이야기였다. 가끔은 할머니의 침대 발치에서 자며 어둠 속에서 숨쉬는 소리를 들었다. 숨소리가 단 2초라도 멈추면 벌떡 일어나 할머니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그 기억이 몇십 년간 나와 함께했다.

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이상한 기분이다. 영화엔 나를 위해 쓴 대사가 있다. 그게 사실이 됐다. '세상의 끝에 도달해 보니, 더 이상 지평선이 남지 않았고, 성취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이 영화를 통해 가장 거대한 '산후 기간'을 겪었다.

유년기의 공포를 영화 속 인물에게 반영하고, 영화를 완성한 이후엔 인물이 겪은 것으로 묘사된 '산후 기간'을 본인 역시 겪었다고 밝힌 일련의 흐름! 흥미롭다. 감독의 페르소나 일부가 인물이 되고, 이후엔 인물의 '산후 고통' 일부가 감독에게 전해지는 과정. (이 작품이 '출산'을 겪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과 그 대가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는 점이 잠깐 떠올랐지만... 넘어가자!)


피조물: "나 예순데... 낳음당했다..."


May monsters inhabit your dreams and give you as much solace as they have given me, for we are all creatures lost and found.


괴물들이 내게 준 위안을 당신에게도 줄 수 있기를. 우리는 결국 모두 분실된 피조물이므로.


한편, 괴물에 대한 기예르모 델 토로의 발언. 애정을 넘어선 동질감이 느껴진다. 괴물이란 존재 자체가 그가 평생 동안 영화를 통해 표현하려 애쓴 것 아니던가? 그런 델 토로의 인생의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낳음당하는 순간은 이렇게 재현된다.


괴물은 명확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이었다. 한편 얼굴에 붕대를 감고 창조자를 향해 걸어오는 그는 예수의 말에 따라 걸어나온 나사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상징의 이미지는 명확하나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한 순간, 괴물은 부활할 준비를 하는 예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예수의 말에 따라 무덤에서 걸어나온 나사로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빅터 쪽이 예수가 된 걸까? (하지만 이후의 행보를 보면 괴물 쪽이 너무 명확하게 예수인데?)



세상에 내던져진 예수

예수면서 나사로인 이 분은 매순간 변화하는 정과 반, 그 자체의 기로에 내던져진다. 그가 살아 있는 자연으로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본 건 인간이 죽어서 썩은 뒤 남은 해골이다. 바로 다음 순간, 살아있는 순록을 만난다. 사슴일 수도 있다. 잘 모른다. 여튼 그것에게 먹이를 주고, 자신도 같은 것을 먹으며 살아 있기를 만끽한다. 그런데 또 다음 순간엔 누가 총을 쏜다. 사슴은 죽는다. 그는 죽지 않는 몸으로 태어났기에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모든 순간을 견뎌야 한다.


삶과 죽음-반대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마주한다


죽음을 반대항인 생명으로 되돌리기를 원하던 빅터와 달리, 피조물은 '낳음당한' 뒤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공간에 '내던져진다'. 여기에는 멜로드라마틱한 파토스가 있다. 수난은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그를 찾아온다. 그는 살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견뎌야 한다.


대안가족 할배. 시간의 흐름 혹은 그의 성숙에 따라 머리카락도 자라난다.

처음으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은 이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슬픔을 느낄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돌아온 가족이 그를 살해자로 여기고 공격한다. 해명할 수 없는 절망적 오해가 슬픔을 더 크게 한다. 그는 유일하게 사랑한 존재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온통 투쟁이고 대립이다. 그는 공격당하고, 피를 흘리며, 죽지 못하게 태어났으므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을 예감한다.



받아들여지지 못할 운명

여기까지의 여정에서 그를 향한 호명의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호명이란, 알튀세르의 개념으로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사회적 역할로 부르는 과정이다. 주체는 호명을 통해 규범을 내면화하고, 역할과 정체성을 자각하며 수용한다.


1. "숲의 정령"

그가 머물던 집에서는 그를 '숲의 정령'이라 불렀다. 괴물은 이에 부응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선의를 베풀었다-가족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2. "좋은 사람"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괴물의 피부에서 손끝으로 흉터를 읽고, 그것이 전쟁을 겪었다고 여긴다. 인간이라 여긴다. 이 오해가 또 한 번의 비극적 파토스를 부른다. 노인은 고통스러워하는 괴물에게, 선의를 가득 담아 '망각'이라는 인간다운 조언을 건넨다. 망각에는 기억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괴물은 기억을 찾아 떠났으며, 그 때문에 자신이 인간이 아닐 수밖에 없게 태어났음을 깨닫고 만다.


한편 노인은 죽을 때까지 괴물이 괴물임을 알지 못했기에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럴 수도 있었다. 괴물은 숲의 정령일 수도 있었고, 좋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것 역시 호명에 응하고 싶어 했다. 정말로 그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기 전까진. (드러남조차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호명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는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다.

한나 스트롱이 인터뷰에서 독해했듯, 그것의 존재는 온전히 전달될 수 없으며(misrepresented), 그것은 항상 온전히 이해되지 못한다(misunderstood).


1막은 이랬다.

2막의 주된 배경은 자연의 녹색이다. 이는 빅터의 오래된 공포, 오만한(혹은 어리석은) 시도, 실패와 좌절에 대해 이야기하던 1막의 어두운 스팀펑크적 아름다움과 대조된다. 자연을 무대로 괴물이 이야기한 2막의 주제는 내던져짐과 내쳐짐, '…되지 못함'이었다. 수동태의 이야기.


이렇게 대립항으로 존재하던 둘이 마침내 얼음 위에서 만나러 간다. 최종_만남.avi.



지금 만나러 갑니다


빅터가 실수로 동생과 결혼할 엘리자베스를 쏘고, 괴물이 실수로 빅터의 동생을 죽인다. 처음으로 그에게 애정을 보였던 인물인 엘리자베스의 죽음 후 괴물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르지 않는 폭력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은 빅터의 코를 부러뜨린다. 빅터는 괴물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괴물이 회상하며 '오직 당신과 나만 남았다'고 표현한, 광활한 얼음 위에서의 추격전을 앞두고 괴물은 예고했다.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 되겠다.


그는 조건을 제시한다. '나를 죽여 봐라. 그러지 못하면 다시 너를 찾아가 고통을 주겠다!' 괴물은 죽을 수 없으므로, 추격전과 고통 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그게 괴물이 바라는 것일까? 괴물은 빅터를 증오하(는 것 같)지만, 그를 충분히 죽일 힘이 있는데도 죽이지 않는다. 빅터가 자신을 쫓아오게 하고, 빅터를 부러뜨리고 상처 입힘으로서 그의 증오와 추격에 연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주인이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는 이를 의미하는 것인가? 괴물은 주인이 되겠다고 함으로서 권력 관계를 전복시킨 것일까?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아란 상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상대를 파멸시키면 인정받을 상대가 사라진다. 따라서 타인을 노예의 위치로 내리고 자신을 주인의 위치로 올리려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주인은 노예가 없으면, 노예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주인일 수 없고, 결국 주인은 진정한 자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됐다. 일단 넘어가자.


BDSM 관계 같은 추격전 끝의 끝으로. 진짜진짜_최종_만남.avi. 이제 두 사람이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각자 시점에서 한 뒤다. 같은 분량으로, 각자의 목소리로, 각자의 관점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과 반이 만났다. 괴물은 말한다. "더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지." 그리고 또 예수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피 흘리고, 아파하고, 고통받을 거야. 영원한 굴레처럼.


예수야, 아빠가 미안해

'용서'

그러자, 마침내 빅터가 말한다. "미안하다." 신속한 사과였다.


쭉 인간이 아니라고, 존재 자체가 죽음이고 추악함일 뿐이라고 여겼던 괴물에게서 그의 목소리로 그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인간됨을 이해했다...고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자신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음을 이해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물의 삶을 마주봄으로서 자신의 삶을 마주보고, 과오를 인정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사과했기 때문에 괴물 아닌 인간으로 죽을 수 있었다…는 결론도 타당할 것이다.


괴물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지 않는다. 대신 떠오르는 해를 마주한다.


그렇게, 피조물은 삶을 향해 나아간다.


피조물과 빅터는 서로를 화해하고 수용함으로서 서로를 완성시켰다. 다른 사람은 해 줄 수 없는, 오직 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출산 장려 영화라고 생각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기 때문에 'complete each other'한 거니까.


그런데, 생각할수록 뭔가... 기이했다. 아름답긴 한데... 굳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이유가?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 프랑켄슈타인인데? 굳이?



그것은 그것인 동시에, 이것이고, 저것일 수도

기예르모 델 토로와 제이콥 엘로디
우리는 모두 괴물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당신에게 괴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선 우리 모두 이상한 부분이 있잖아요.

-인터뷰 발췌


결론에 다다랐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거다.


그냥 이 할배의 60년 묵은 진심이 너무 큰 거였다. 다른 말로는, 이 이야기를 너무 사랑한 거였다. 괴물은 예수기도 하고 나사로기도 하면서 델 토로기도, 우리 모두기도 했다. 이 양반은 괴물이기도 했지만, 빅터로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한 거였다.


할배는 그 점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온갖 플랫폼과의 인터뷰에서 질리지도 않고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했다. 평생 '너 자신으로 있어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괴물을 사랑해 온 그인 만큼 괴물의 '괴물됨'에 공명했고, 동시에 괴물의 창조주인-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인-빅터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넣은 뒤 역으로 인물의 이야기에 영향받음으로서 공명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원형, 그리고 거울의 미장센. 그건 진짜 할배의 마음을 완벽하게 담은 표현이었다. 모든 존재는 독자적일 수 없기에 서로를 비추고 반영하며, 그렇게 시작과 끝이 이어진다는.


오스카 아이작 역시 이 영화가 기능하기 위해 그런 동시다발적 공명이 필요함을 캐치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카 아이작이 마지막 장면의 재촬영을 요구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


나로서 연기했거든요. 내 아버지로서 다시 하고 싶어요. (...) 괴물이 되고 싶은 동시에, 내 아버지가 되고 싶기도 해요. 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는.


아, 이쯤 되면 받아들여야 된다 싶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이건 이 할배의 쪼대로 영혼과 사랑을 담은 살풀이고 평생 소망이다. 한 번쯤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이런 결말을 맞을 수 있음을 그냥 느끼면 된다.


세 문단 위, '우리는 모두 괴물'이라고 말한 할배의 인터뷰에는 심지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 양반은 40대쯤 됐을 때 일곱 살 때 원하던 집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투자했단다. 실제로 '프랑켄슈타인' 자체에 그냥 바친 방도 있고, 그게 거실인데(거실이 뭔지 아는 거 맞나?), 아침마다 그 방에서 피규어들한테 인사하고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한다. (진짜... 거실이 뭔지 아는 거 맞나?) 졸라 압도된다. 내가 졌다.


독하다 독해…


할배가 생을 통째로 여기다 담았고, 다들 아름다운 결말을 맞았으면 좋겠댄다. 실제로 그 순간은 아름다웠다. 그럼 그러려니 해야지. 완전 이런 기분 되는 거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뭔가 '읽고 쓸' 생각이었는데, 인터뷰 몇 개 보고 바로 압도됐다. 완전 의지를 잃었다. 할배 하고 싶은 거 다 하쇼.


헤겔은 정과 반이 부딪혀 합이 되는 변증법이 주인과 노예에게도 적용된다고 했다. 알튀세르는 호명이라는 테제에서 나아가 개인이 늘 사회구조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구조를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그런 소리에 담긴 아름다운 본질을 진심으로 관철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그냥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할배가 그게 삶이랜다. 혹은 할배가 평생 믿고 원해 온 삶이랜다. 순수 체급 리스펙이다.


빙하에 갇혀 있다가, 선한 괴물쿤의 도움으로 바다로 나아간 배.

배가 바다로 나아간 직후, 선원이 선장에게 명령을 내려 달라고 한다. 선장은 조용히 말한다. 돛을 올려. 돌아가자. 그러자 선원은 다시 말한다. 직접 말씀하시겠어요? 그러자 선장은 갑판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 높여 외친다.

집으로 가자!


배가 이미 나아가고 있어도, 누군가 목적지를 소리 내서 말해 주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이게 할배가 하고 싶었던 일이지 싶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삶에 주어져야 마땅한 결말을 선언하는 것.



*


녹색의 인물, 엘리자베스.
I sought and longed for something I could not quite name. But in you I found it. (...) Better this way… to fade… with your eyes gazing upon me.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찾고 갈망해 왔어. 네게서 그걸 찾았어. (...) 이렇게 되는 게 나아... 서서히 사라지는 게... 네 눈이 날 바라보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이야기는 잠깐 하고 마무리해야겠다.엘리자베스는 유일하게 괴물을 호명하지 않기를 택한 인물이었다. 영화의 유일한 여성이며, 자연을 상징하는 녹색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여성을 기의하는 기표에는 '낳는 몸', 나아가 '자연' 그 자체가 있다. 근대 서구의 시선에서 자연이라는 객체는 인간이라는 주체에 의해 탐구당하고 정복당한다. 인간은 곧 남성으로 동치된다. 자연은 여성이 된다. 혹은 여성이 자연이 된다. 그 시대를 산 메리 셸리는 자연을 '관통당하는' 수동적인 것으로만 두지 않았다. 생명과 자연을 정복하고자 한 빅터는 자연과 피조물에게 반격당했다.


상기할 것. 메리 셸리의 소설 속 괴물 자체를 여성의 재현으로 읽는 비평의 방식 역시 존재한다. 규범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지성과 자유를 얻는 그의 존재가 가부장제의 규율을 거부하는 여성의 운명을 재현한다는 시각이다.


영화에서, 자연을 갈망하는(이 말은 꼳 해야겠다. 괴물을 이성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다) 명확한 낭만주의 사조를 지닌 여성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아무래도 괴물의 ”여성성 재현“에 밀린다.


영화에 나오는 여성은 둘뿐이다. 하나는 엘리자베스, 또 하나는 빅터의 어머니. 어머니의 죽음은 빅터에게 트라우마를 안겼고, 앨리자베스의 죽음은 괴물의 분노를 불렀다. 미아 고스가 죽는 여자 둘을 모두 연기함으로서 두 여성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점-이에 관한 재밌는 해석 역시 가능은 하겠으나-여자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결과로 작용했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쉽다. 미아 고스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아까울 정도.


사실 나는 미아 고스가 그 누구보다 피조물 역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델 토로 할배도 잘 생각해 보면 아마 동의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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