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롤하지 못하니까 문제인 거다
ADHD인 친구들은 흔히 <망상>을 많이 한다. 전문용어는 아니고 나만의 단어다. 공상 혹은 상상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망상이란 단어의 황당한 어감이 날 웃게 만들기 때문에 망상이라 칭하겠다. 사람마다 망상을 언제, 어떻게, 어떤 계열로 하는지 그 양태는 전부 다르다.
외부 자극/본인 노력을 통해서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만은 확연한 증상이다. ADHD 아동들이 남이 말하는 와중에 자신만의 생각, 공상에 빠져드는 증상을 보임을 생각해 보자. 그 연장선이다.
가까운 사람이 약의 도움을 받아 ADHD적 망상 중단 스위치를 누를 수 있게 된 예시가 있다.
“주로 손을 씻는 행위 중 망상이 시작된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니 그 망상을 마음대로 중단하고 손 씻기를 신속하게 끝낼 수 있어 놀랐다. 약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다”
손 씻는 걸 빨리 못 끝낸다니… 거짓말 같나요? 지금까지의 모든 글이 그랬듯 실화입니다. 양치나 목욕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직접 장기간에 걸쳐 목격했습니다.
전 글에서, 스스로 정한 무언가에 요구치 이상으로 집중하는 힘을 편의상 (+)로 칭했다. 과하다는 건 좋은 게 아니다. 통제를 잃는다는 거니까. (+)라고 해서 마냥 (positive)는 아니란 거다.
다른 단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Perseveration.한국어로는 ‘보속증’ 혹은 ‘고집증’ 으로 번역된다. 언어장애 필드에서도 많이 쓰이는 말이다.
“어떤 새로운 동작을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같은 동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아산병원 홈페이지 발췌
질문 A에 대해 환자가 a라는 답을 했다고 하자. 이제 다음 질문인 B가 주어진다.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뀐 것인데, 뇌는 이전 행동에 갇혀 a라는 답을 반복한다.다음 과제인 b로 넘어가지 못한다.
동일 행동 반복-손 흔들기, 같은 구간 왕복하기, 같은 말 되풀이하기 등-을 보이는 상동증과는 다르다. 외부의 자극과 요구가 있어도, 사고를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도 계속 동일한 어구, 문장,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뇌 장애, 부상 등으로 유발된다. 치매도 포함이다.
심리학 필드에도 해당 단어의 정의가 있다. 일부 발췌하면 이렇다.
1. 무언가를 예외적인 수준으로, 혹은 적절한 지점 이상까지 지속해 행하는 것
2.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가지 못하는 ‘불능’ 상태
자폐와 조현병 등 다른 분류의 신경다양인도 이와 같은 특성을 보인다. 뇌의 문제니 당연하다. ADHD 유발 유전자와 자폐 유발 유전자가 꽤 겹친다는 연구도 있었다. 여러 신경다양성을 동시에 지닌 사람도 많다. (영미권에선 자폐Autism와 ADHD 모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AuDHD라고 부른다.)
이런 ‘넘어가지 못하는‘ ’불능‘ 상태가 과집중과 연결된다. 과집중=보속증으로 완벽히 동치되지 않지만, 둘을 완벽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과집중이라는 말에는 대부분 ‘다른 곳으로 주의를 전환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상태’가 전제되기 때문에.
‘하루종일’ 유도 생각만 했던 케이스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겠다. 허구나 과장 없는 100% 실화다.
1) 낮의 모든 시간을 투자해 유도를 생각한다.
선수 영상을 찾아보고, 내 영상과 비교하고, 뭐가 다른지 찾고, 어떤 부분을 바꿀지 찾고, 어떤 훈련을 통해 바꿀 수 있을지 찾는다. 노트북에서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새 창을 켰다가도 결국 영상을 찾아보고 싶어서 다른 일은 전혀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한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진짜 하루종일 저랬다. 일하려고 카페 갔다가 유도 영상만 50개 정도 보고 돌아와서 집에서 또 밥 먹으면서 유도 영상을 켜는 거다.
2) 밤이 됐다. 고개를 들어 주세요. 달라진 건 없다.
남은 시간은 운동 끝나고 돌아온 뒤뿐이다. 진짜 할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즐겁게 운동을 끝내고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유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마음이 온통 유도에 가 있다.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일단 침대에 누워 그 날 운동했던 영상을 본다. 가벼운(혹은, 때로는 극심한) 흥분 상태다. 뭘 잘 했는지, 뭘 못 했는지 본다. 그리고 또 거기서 가지를 쳐 유도에 대해 생각하고, 유도에 대해 알아본다. 빠져나오지 못한다.
3) 휴식?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끔 피곤해서 낮잠을 자려고 눕는다. 그럼 상상 속에서 유도 대련이 시작된다. 멈추지 않는다. 내가 질 경우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대비할지 생각한다. 내가 기술을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고, 그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영원히 계속된다. 자고 싶지만 잘 수 없다. 재미있지만 괴롭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 같은 경우 시간의 흐름을 인지는 한다. 한 시간 지났네. 두 시간 지났네. 세 시간 지났네. 미치겠군! 자야 되는데 멈출 수가 없다! 시간을 '잊지'는 않는다. 시간이라는 하찮은 것이 나를 멈출 수 없을 뿐이다.
사람마다 과집중의 양상은 다르다. 적당히 컨트롤 가능할 수도 있고, 라이프스타일/환경이 바뀌어 이전까지 컨트롤하던 방식이 블가능해질 수도 있다. 과집중 시간은 ADHD인들이 괴로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시간이다. 하염없이 폐급처럼 일을 미루면서도 “그래도 괜찮아… 결국은 몰아서 해내니까!”라고 정신승리하게 해 주는 최후의 보루기도 하다. 애증 그 자체.
선수 레벨의 체육이란 모두가 동등하게 죽도록 노력하기에 재능이 큰 요인인 반면, 생활체육은 ‘시간 싸움’이기네 더 그랬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랜 기간 시간을 쏟았느냐가 발전 속도를 결정한다. (오해 금지. 생활 체육의 목적은 실력, 승리, 발전, 이런 것만 있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운동을 통해 생활 전반의 육체적이며 정신적 질을 높이게 도와 주는 것이 생활 체육입니다.)
주 5회, 매일 두 시간씩 운동하고, 주말에도 일부러 시간 내서 또 하고, 운동 안 하는 시간에는 운동만 생각했다. 당연히 이론과 지식은 다른 사람보다 많았다. 실제로 몸을 더 많이 움직였기 때문에 근력도 더 빨리 늘었다. 동시에 잃은 것도 많다. 운동과 병행하려다 실패한 일이… 꽤 많다. 다 적자면 가슴아프다.
내 인생 메타.
1) 일정 기간 동안 한 분야에서 매우 빠르게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만
2) 그 기간은 일상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을 놓치는 때기도 하다.
3) 집중 구간이 끝날 때 해당 분야의 성과도 끝난다.
내가 뭔가 하게 만들어 주던 유일한 동기가 사라진 거니까, 더 하지 않는다. 혹은 하지 못한다. 그렇게 평생에 걸쳐 절대 뭘 꾸준히 하지 못한다. 스위치가 작살났으니까.
그게 내 컴플렉스였다. 항상 내가 내 자신을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음 안에 있는 그 사실을 무시하려고 애써 왔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아니까.
한 분야에서 어떤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한다. 재미없는 시기를 넘겨야 한다. 그걸 넘기면서 그냥 해야 다음 단계로 간다. 그걸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위해 필요한 수많은 '실행'을 하지 못해 실패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실패할 거라고 희미하게 예지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살 거라고 느꼈다. 그걸 표현할 언어는 몰랐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 와중 ADHD에 대한 생각은 일부러 외면했다! 내가 그냥 게으르고 노력 안 하는 사람인데 괜히 변명할 거리 찾으려고 돈 쓰는 사람 될 것 같아서!)
하려고 애쓰다 보면 언젠가는 될 거라고 믿었다-혹은 믿으려고 했다. 노력을 멈춘 적은 없다. 루틴 만들기, 목표 분류하기, 태스크 리스트 세분화하기… 등 ADHD에게 추천되는 것들 많이 해 봤다. 그래도 실패와 좌절이 계속됐다. 그 좌절, 영원히 안 될 거고 이로 인해 점점 문제가 커질 거라는 마음 속 예언이 때때로 날 찾아왔다 떠나가길 반복하던 불안장애의 큰 이유다.
진단을 받고 약을 먹은 뒤 바뀌었다. 자극제 계열인 콘서타는 먹는 즉시 효과가 도는 약이다. 바로 당일부터 딱! 바뀌었다, 진짜로.
몇 번 말해도 부족할 얘기. 약이 모든 걸 마법처럼 고쳐 주는 건 아니다. 의사도 그 말을 했다. ADHD환자가 흔히 보이는 약속 시간에 늦는 습관. 이런 건 약이 고쳐 주지 못한다. ‘노력’해야 한다. 약이 도움을 주는 건 충동 조절, 실행 기능에 대한 부분이다.
약은 우리의 뇌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능', 즉 스위치를 누르는 기능에 영향을 준다. 전 글에서 약을 먹으니 설거지를 끝까지 할 수 있게 됐다고 쓴 것처럼. 이번 글 서두의 '손 씻는 중 망상'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자. 평생 그렇게 살아왔는데,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약을 먹으니 갑자기 뭐가 된다! 딱 이런 감각이다. 친구 중 하나는 이렇게도 표현한 적 있다.
"평생 줄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땅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아주 적절한 비유다. 때문에 약을 먹은 뒤 약에 조종당하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많다.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던 어떤 부분들이 ‘자연스레’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황당한 거지. 자연스레 ‘된다’니까!
이렇게 두 편의 글에 걸쳐, 신경다양인-내 주변에는 ADHD가 제일 많고, 자폐인이 그 다음이다. 본인이 ADHD라 그쪽에 집중해서 썼다. 어쩌면 자폐가 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들이 말하는 과집중에 대해 '두 가지 스위치가 전부 고장남'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해 봤다.
사람마다 과집중의 양상, 강도, 그로 인해 놓치는 것과 얻는 것은 다 제각각이겠지만, 모두가 과집중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지니며, 과집중의 행위가 가져오는 감정/결과 역시 양가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염없이 그것에 빠져드는 경험 자체는 흥분되고 고무적이며 중독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일을 미루는 과정에서 불안을 겪은 뒤 단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짜릿한 경험, 그 과정에서 느끼는 효능감 등이 그 과정을 긍정적으로 보게도 한다.
나 역시 과집중으로 잃은 것들을 아쉬워하나, 동시에 그 시간으로 인해 얻은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건 바꿀 수 없는 내 인생이니까. 지식,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시간을 보냄으로서 사귀게 된 친구들. 이 마지막 건 진짜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거다. 보너스로 어찌저찌 괴로워하며 따 버린 유도 생체지도사 자격증도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스위치를 어느 정도는 조절하는 기능을 얻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거기에 쏟을 시간을 정해 두고, 다른 일을 하기로 한 시간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영원히 특정 생각에 갇혀 있지 않는 것. 이걸 해냈을 때 나름 만족감이 크다. (살면서 처음이라고요!)
신경다양성은 '완치되는'게 아니다. 의사도 말했다. '치료'하는 게 아니라고, 사람이 약의 도움을 받고, 세월이 지나 성숙해 가며 내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약을 먹고,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되는 '불능' 상태의 기능들에 도움을 받을 순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자신을 뜯어고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뇌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나의 상태를 알고, 노력을 통해 이해하고,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내 자신을 둘러싼 환경(작게는 쓰레기장 같은 책상 주변 구성부터 크게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릴지)을 어떻게 구성할지, 이런 것들을 조절해 가는 거다.
인 거다.
마지막으로, 내가 내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최근 쓰는 방식을 올려 본다.
이런 식으로 매일 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썼는지, 어떻게 과제를 전환했는지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업무가 바뀔 때마다 색을 칠한다. 주 단위로 진행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는 위에 적어 두고 마치면 체크한다. 사진 편집 과정에서 체크 표시가 다 지워져서 아쉽다. 자랑하고 싶은데.
여튼,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효과가 있는 기록 방식이라 내 특성에 완전 잘 맞는다. 그리드 한 칸마다 30분인데, 저 한 칸 그릴 때마다 뿌듯하다. (혹시... 이런 때도 도파민이 나오는 거냐?) 약을 먹기 이전에는 저걸 하고 싶어도 못 했는데(이 여정에 대한 글도 적을 예정입니다), 약 먹으니까 저게 다 됐다.
단점. 주중에 저걸 하며 내 하루의 시간을 인지하다 보니 주말의 기록하지 않은 시간이 살짝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놀 때는 재밌었는데 일요일 저녁에 돌아보면 대체 뭘 했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적당히 인지를 바꾸면 될 거라 큰 문제는 아니다.
이제 진짜 다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녕! 다음 주제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