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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현 Dec 28. 2020

김보라 감독, <벌새>

그 삶에 이름붙일 수 있다면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서로 얼굴은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벌새>는 은희의 이야기다. 가장 간단히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적어 보자. <벌새>는 1994년, 은마 상가에서 떡집을 하시는 부모님 아래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대청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 은희의 이야기다.


위에서 인용한 영지 선생님의 첫 수업 구절대로, 은희의 삶에는 얼굴만 아는 사람이 가득하다. 전반부에서 은희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파편적으로 존재한다.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 단짝 친구, 한자 학원, 오빠의 폭력, 부모의 불화, 남자친구와의 키스.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서사로 통합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궤적 역시 중첩되지 않아 그들은 일관성 없는 '은희의 무엇'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은희는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리고 극이 후반부로 가며 이 모든 ‘은희의 무엇’들은 한데 모여 서사를 지닌 은희의 삶, 나아가 ‘한국 여성의 삶’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수술, 그리고 영지 선생님


은희가 만난 사람들은 수술을 전후해 크게 바뀐다. 개포 상가에서 도둑질을 한 게 걸렸을 때 은희의 부모님이 일하는 곳을 일러바쳤던 친구와는 곧 수술을 한다며 울고 화해한다. X-자매를 맺고 애매한 호감들을 주고받던 후배 유리가 병문안을 오자 두 사람은 마침내 병실에서 남몰래 입을 맞춘다.


(그러나, 입맞춤이 일련의 ‘썸’의 결과라는 보편적 인식과 달리, 유리는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은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황한 은희가 ‘너랑 잘 해 보고 싶었다’고 하자 유리는 ‘언그지학’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이 중 은희에게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인물은 한자 학원에 새로 부임해 온 선생님, 영지다. 그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모두를 대등하게 대하는, ‘다른 어른들과는 다르게’ 존중하고 또 존중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된다. 자연히 은희는 그에게 의지한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차를 대접하고, 떡을 받고, 책을 선물받고, 편지를 보내고, 또 이후의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집에 가기 싫어하는 은희와 거리를 걷고, 철거에 대항해 시위 중인 상가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은희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이전에 은희에게 세상이란 일관성 없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은희 역시 누군가를 이해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죽일 듯이 싸운 다음날 평범하게 웃으면서 TV를 보고, 유리는 그렇게 상대를 좋아했던 게 언제냐는 듯 ‘언그지학’이라고 한다. 은희 역시 자신과 이야기하러 온 전 남자친구에게 “미안할 거 없어. 나 너 좋아한 적 없거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달랐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겠지?



은희에게 그의 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은희는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영지 선생님이 떠나는 날 선생님이 오는 시간을 잘못 알려 준 원장 선생님에게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그 행동의 정당함, 혹은 어른스러움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오빠에게 처음으로 “미친 새끼”라고 소리치며 맞서 싸운다.


다시 말하자면 영지 선생님은 은희와 ‘진짜 좋아하는’ 관계를 쌓은 유일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은희가 전 남자친구나 유리와 쌓았던 관계는 다소 피상적이고 한정적인 관계였다. 은희가 기념일 선물로 준비한 카세트나 유리가 은희에게 줬던 장미꽃은 전부 일방적인 마음의 표현이자 자기만족이었을 뿐,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것처럼 ‘오고가는’ 것들, 나아가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아니지 않았는가?



성수대교 붕괴와 영지 선생님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라는 재앙이 일어난 날, 은희의 온 세상은 난리가 난다. 은희는 집에 전화를 해 그 시각 성수대교를 지날 예정이었던 언니의 안부를 절박하게 묻고, 다행히도 은희의 언니는 버스를 늦게 타 무사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 뒤 영지 선생님의 집에 찾아간 은희는 그 사고로 영지 선생님이 죽었음을 알게 된다. 영지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영지 선생님의 방에는 은희가 알 기회가 없었던 생전의 영지 선생님의 모습과 흔적들이 가득하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열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여 본다던 선생님의 말대로, 은희는 그 방에서 열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방학이 끝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방학이 끝나면 다 이야기해 주겠다던 영지 선생님의 약속은 이제 영원히 지켜질 수 없고,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남기고 간 것들만을 간직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은희와 은희의 언니는 어른들 몰래 차를 타고 한강변으로 향한다. 무너진 성수대교가 보이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변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지 선생님의 죽음을, 또 은희 언니의 친구들의 죽음을.


은희의 파편적이던 경험이 바깥 세계와 상호적으로 만나며 넓어지는 순간이다. 세상은 원하지 않아도 개인에게 좋거나 나쁜 영향을 끼치고, 은희는 이를 받아들이며 계속 살아나가는 법을 막 배우기 시작했다.


이전에 영화가 은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비출 때 관객이 볼 수 있는 범위는 줄곧 은희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화면이 비치는 친구의 얼굴, 한자 학원의 칠판, 신발장이 있는 현관의 풍경, 엄마가 깬 전등이 있는 베란다, 엄마에게 무력하게 끌려가는 남자친구의 뒷모습 등은 은희가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정적으로 머물렀다. 씬이 바뀌기 직전 클로즈업되곤 하는 사물들-화분이나 깨진 전등-역시 은희의 한정된 정적 시야를 벗어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카메라의 시야는 달라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은희의 어머니가 부침개를 먹는 딸을 옆에 앉아 바라볼 때 어머니의 모든 얼굴, 표정과 시선은 온전히 카메라에 담긴다. 은희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마치 꿈 속을 걷는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던 어머니를 비출 때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마치 어머니를 바라보는 은희의 시선이 달라진 것처럼.


이후, 영화 초반에서 은희의 뒷담을 까던 학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던, 즉 은희의 시야에 관심없는 사람은 담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카메라에는 수련회를 앞두고 신나 있는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잡힌다. 마치 은희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파편적이고 폐쇄적이던 은희의 삶은 수술(개인의 변화), 영지 선생님의 죽음(소중한 사람의 변화),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세계의 변화)를 거치며 외부와 적극적으로 맞닿아 관계 맺기 시작하며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보편성의 획득과 재현


<벌새>는 이렇게 극 내부에서 서사성을 획득하는 한편, 극 외부적으로는 여성 보편적인 경험의 공유 및 공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소년기, 청년기, 학창 시절의 방황, 직장 생활의 고초, 인생, 전쟁, 역사 -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서사는 언제나 남성의 서사였다. 반면 여성의 이야기는 언제나 변두리의 예외적인 서사로 취급받아 왔다.


그 이유는 물론 여성 인권의 낮은 위치 때문이며, 2019년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성 서사/역사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기록된 수많은 여성의 전쟁 참가 경험에 대한 '구술사'는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 즉 권위를 지닌 보편적 거대 서사로 취급받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625 전쟁과 민주화 운동의 물결, 이 일련의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에서도 그 현장에 분명 존재했던 수많은 여성들은 쉽게 지워지고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보편적으로,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현장은 전혀 어색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여성이 재현되는 양상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어 왔다. 굳이 여기서 길게 적지는 않겠다. 근 십년간 한국 영화의 포스터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았는지와, 그 동안 여성들이 '아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딸', '남자의 여자친구', '창녀', '성녀' 등 남성에게 종속돼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역 이외에 어느 정도 다양한 역을 맡을 수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어림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벌새>는 이런 남성의 시선, 남성 입장에서의 서사 대신 십 대 청소년인 은희의 시선으로 은희의 서사를 풀어 놓기를 택한 영화다. 위에서 언급했듯 관객이 좇아가는 것은 곧 은희의 개인적인 시선이며, 개인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순간들을 세밀하고도 믿음 가게 묘사한다.


은희의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하지만 ‘대중 영화’가 쉽게 보여 주지 않았던 경험의 순간들: 집에서 혼자 블루스를 추다가 테니스 연습이라며 퉁치는 아버지를 목격하는 것, 저녁 식탁에서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인시키듯 혼자 욕설을 내뱉고 소리지르는 아버지의 모습, 그에 대한 소극적 대항으로 “콩나물이 쉬었나”라고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모습, 외진 곳에서 남자친구에게 “키스해 볼까? 혀도 넣어 볼까?” 하고 제안하는 순간, X자매를 맺고 같은 여성인 X동생과 병실에서 키스하는 순간.


또 의미를 떠먹여 주지는 않지만, 관객은 일상의 보편적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 수술을 앞둔 은희 옆에서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아버지, 성수대교 붕괴 때문에 친구를 잃은 은희의 언니 옆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은희의 오빠.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1994년이라는 시대, 즉 이야기 속의 시간적 공간에 대해 믿음이 가게 만드는 장치들, 나아가 그 시간적 공간에 대한 경험이 개인에게 의미를 갖게 만드는 묘사: 상가 철거, 그 앞을 지나가는 은희, 김일성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와 이 때문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



이렇게


김보라 감독은 <벌새>를 통해 ‘보편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남성 중심적 시선과 경험에서 벗어난 여성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밀도 있게 완성해 낸다.


나아가, <벌새>는 수많은 여성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며 다수의 컬트적 팬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수많은 관객의 공감을 샀다는 점은 극 내부적인 완성도의 증명과 더불어 극 외부적으로 대중적이며 진보적인 여성주의와 훌륭하게 맞닿았다는 지표가 될 것이다.


은희가 그 시절의 나와는 조금 다르더라도 이 영화가 선사하는 서사 내외부의 다층적인 경험-관객 개인으로서 감상하고, 관객 집단과 공통적인 경험을 주고받는-에 어울리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실상 이입하지 못할 이유란 전혀 없다. 지금까지 대부분 매체의 주인공-대부분의 경우 나와 다른 계급, 다른 성별을 지닌,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는-에 대한 이입이 쉽게 이루어져 왔으며 관객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듯, 은희의 처지가 나와 조금 다르더라도 이를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특별히 어려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공감과 이해가 어려워야만 할 이유를 정치적 발로로, 의식적으로 찾지 않는 이상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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