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삶에 이름을 붙이기를 요구하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서로 얼굴은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벌새>는 은희의 이야기다. 좀 더 상세히 적어 보자. <벌새>는 1994년, 은마 상가에서 떡집을 하시는 부모님 아래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대청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 은희의 이야기다. 이렇게 적으니 좀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위에서 인용한 영지 선생님의 첫 수업 구절대로, 은희의 삶에는 얼굴만 아는 사람이 가득하다. 전반부에서 은희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파편적으로 존재한다.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 단짝 친구, 한자 학원, 오빠의 폭력, 부모의 불화, 남자친구와의 키스.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서사로 통합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궤적 역시 중첩되지 않아 그들은 일관성 없는 '은희의 무엇'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은희는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리고 극이 후반부로 가며 이 모든 ‘은희의 무엇’들은 한데 모여 서사를 지닌 은희의 삶, 나아가 ‘한국 여성의 삶’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수술, 그리고 영지 선생님
은희가 만난 사람들은 수술을 전후해 크게 바뀐다. 개포 상가에서 도둑질을 한 게 걸렸을 때 은희의 부모님이 일하는 곳을 일러바쳤던 친구와는 곧 수술을 한다며 울고 화해한다. X-자매를 맺고 애매한 호감들을 주고받던 후배 유리가 병문안을 오자 두 사람은 마침내 병실에서 남몰래 입을 맞춘다.
(그러나, 입맞춤이 일련의 ‘썸’의 결과라는 보편적 인식과 달리, 유리는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은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황한 은희가 ‘너랑 잘 해 보고 싶었다’고 하자 유리는 ‘언그지학’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은희에게 변화를 불러온 인물은 한자 학원에 새로 부임해 온 선생님, 영지다. 그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모두를 대등하게 대하는, ‘다른 어른들과는 다르게’ 존중하고 또 존중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된다. 자연히 은희는 그에게 의지한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차를 대접하고, 떡을 받고, 책을 선물받고, 편지를 보내고, 또 이후의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집에 가기 싫어하는 은희와 거리를 걷고, 철거에 대항해 시위 중인 상가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은희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이전에 은희에게 세상이란 일관성 없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은희 역시 누군가를 이해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죽일 듯이 싸운 다음날 평범하게 웃으면서 TV를 보고, 유리는 그렇게 상대를 좋아했던 게 언제냐는 듯 ‘언그지학’이라고 한다. 은희 역시 자신과 이야기하러 온 전 남자친구에게 “미안할 거 없어. 나 너 좋아한 적 없거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달랐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겠지?
은희에게 그의 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은희는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영지 선생님이 떠나는 날 선생님이 오는 시간을 잘못 알려 준 원장 선생님에게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그 행동의 정당함, 혹은 어른스러움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오빠에게 처음으로 “미친 새끼”라고 소리치며 맞서 싸운다.
다시 말하자면 영지 선생님은 은희와 ‘진짜 좋아하는’ 관계를 쌓은 유일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은희가 전 남자친구나 유리와 쌓았던 관계는 다소 피상적이고 한정적인 관계였다. 은희가 기념일 선물로 준비한 카세트나 유리가 은희에게 줬던 장미꽃은 전부 일방적인 마음의 표현이자 자기만족이었을 뿐,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것처럼 ‘오고가는’ 것들, 나아가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아니지 않았는가?
성수대교 붕괴와 영지 선생님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라는 재앙이 일어난 날, 은희의 온 세상은 난리가 난다. 은희는 집에 전화를 해 그 시각 성수대교를 지날 예정이었던 언니의 안부를 절박하게 묻고, 다행히도 은희의 언니는 버스를 늦게 타 무사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 뒤 영지 선생님의 집에 찾아간 은희는 그 사고로 영지 선생님이 죽었음을 알게 된다. 영지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영지 선생님의 방에는 은희가 알 기회가 없었던 생전의 영지 선생님의 모습과 흔적들이 가득하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열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여 본다던 선생님의 말대로, 은희는 그 방에서 열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방학이 끝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방학이 끝나면 다 이야기해 주겠다던 영지 선생님의 약속은 영원히 지켜질 수 없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과거에 남긴 것만을 간직할 수 있다.
이후 은희와 은희의 언니는 어른들 몰래 차를 타고 한강변으로 향한다. 무너진 성수대교가 보이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변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지 선생님의 죽음을, 또 은희 언니의 친구들의 죽음을.
은희의 파편적이던 경험이 바깥 세계와 상호적으로 만나며 넓어지는 순간이다. 세상은 원하지 않아도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은희는 이를 받아들이며 계속 살아나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전에 영화가 은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비출 때 관객의 시야의 범위는 줄곧 은희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화면이 비치는 친구의 얼굴, 한자 학원의 칠판, 신발장이 있는 현관의 풍경, 엄마가 깬 전등이 있는 베란다, 엄마에게 무력하게 끌려가는 남자친구의 뒷모습 등은 은희가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정적으로 머물렀다. 씬이 바뀌기 직전 클로즈업되곤 하는 사물들-화분이나 깨진 전등-역시 은희의 한정된 정적 시야를 벗어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카메라의 시야는 달라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은희의 어머니가 부침개를 먹는 딸을 옆에 앉아 바라볼 때 어머니의 모든 얼굴, 표정과 시선은 온전히 카메라에 담긴다. 은희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마치 꿈 속을 걷는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던 어머니를 비출 때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은희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이후, 영화 초반에서 은희의 뒷담을 까던 학생들의 얼굴이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던, 즉 은희의 시야에 관심없는 사람은 담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카메라에는 수련회를 앞두고 신나 있는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잡힌다. 은희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주변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파편적이고 폐쇄적이던 은희의 삶이 수술(개인의 변화), 영지 선생님의 죽음(소중한 사람의 변화),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세계의 변화)를 거치며 외부와 적극적으로 맞닿아 관계 맺기 시작하는, 너무나 보편적인 이야기.
재현된 것들
은희의 순간들: 집에서 혼자 블루스를 추다가 테니스 연습이라며 퉁치는 아버지를 목격하는 것, 저녁 식탁에서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인시키듯 혼자 욕설을 내뱉고 소리지르는 아버지의 모습, 그에 대한 소극적 대항으로 “콩나물이 쉬었나”라고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모습, 외진 곳에서 남자친구에게 “키스해 볼까? 혀도 넣어 볼까?” 하고 제안하는 순간, X자매를 맺고 같은 여성인 X동생과 병실에서 키스하는 순간.
관객이 삶의 보편적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 수술을 앞둔 은희 옆에서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아버지, 성수대교 붕괴 때문에 친구를 잃은 은희의 언니 옆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은희의 오빠.
1994년이라는 이야기 속 시간적 공간에 대해 믿음이 가게 만드는 장치들, 나아가 그 시간적 공간이 더 큰 세상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 상가 철거, 그 앞을 지나는 은희, 김일성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와 이 때문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
이렇게
<벌새> 속 은희의 시선이 현 시대와 만나는 순간, 영화는 여성들이 이 순간 요구하는 것을 드러내는 정치적 창구로서 기능했다.
많은 여성 관객이 이 영화의 컬트적 팬을 자처하고 있다. 이는 곧 영화가 ‘대중적 여성주의’라는 극 외부의 시대적 요구와 맞닿았음을 보여 주는 지표일 것이다. 1994년 은희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세상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듯, 오늘날의 여성들은 이 자기중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감상함으로서, 나아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여성이 많음을 감지하고 서로를 확인함으로서 세계와 맞닿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보편성을 증명받고자 하는 욕구가 정당함을 인정받는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1968년의 외침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순간.
이 영화가 선사하는 서사 내외부의 다층적 경험-관객 개인으로서 감상하고, 관객 집단과 공통적인 경험을 주고받는-에 어울리기를 요구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시대의 관객들이다. 뭐, 생각해 보면, 은희의 어린 시절이 나와는 다르대도, 이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대부분의 경우 나와 다른 계급과 성별을 지닌,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는-에 대한 이입이 쉽게 이루어져 왔으니.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의식적으로 찾지 않는 이상 이 영화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어려워야만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수많은 이의 확신. 그 목소리들이 내 주변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