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은 일제강점기 하 3대 독립운동(3.1 운동, 11.3 광주학생독립운동, 6.10 만세운동) 중 하나인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로서 선조들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기념일로 지정된 날입니다.
독립운동에 힘쓰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누구 덕이겠습니까.
[6.10 만세운동은 순종이 사망한 날짜를 기점으로 일어난 독립운동. 1926년 6월 10일 일본 경찰의 경계를 뚫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 운동으로, 전국에서 약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확대되어 약 100여 명이 대거 검거되었다. 6·10 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결합 경험은 이후 신간회를 창설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다음 백과 인용)]
오늘자로 딱 100년 전이면 1922년이니깐 그 당시 태어났다면 해방 전까지 23년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 시작되는 해인 것 같습니다. 태어나니 조국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무단통치를 받고 있어서 땅은 물론 모든 문화와 언어까지 빼앗겼습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10대와 20대 초반을 일제강점기에서 일제의 교육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네요.
만약 이때 제가 태어났다면, 10대 중고생의 시절과 20대 초반의 생을 살아감에 있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을까요? 10대 청소년, 중고등학생이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니깐 그런 가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6,10 만세운동의 주체도 학생들이었고 11.3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의 주체 역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일제에 맞서 동맹휴학을 하며 맞서 싸웠습니다. 당연히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겠죠.
나는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기리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늘 간직하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온전히 사과하고 반성하기 전까지는 가급적 NO JAPAN에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 나주로 떠나봅니다.
오늘의 랜선 전시관 투어는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전시기획 일을 시작한 지 5년 정도가 지났을 때 실시설계를 시작하여 전시물 제작설치 공사까지 완료했던 프로젝트입니다. 2008년 개관했습니다. 위치는 구 나주역사(일제강점기 사용한 기차역) 옆에 위치한 2층 규모의 기념관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실까요.
구 나주역사와 그 옆에 위치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이곳에 가시면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왜 나주, 옛 나주역사 옆에 건립되었을까요?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이곳 나주역에서 발생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체 중 일부가 나주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합니다. 일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희롱(?)을 하면서 조선과 일본 학생들 간의 집단 싸움으로 시작해 11월 3일 광주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번지고 이후 전국으로까지 확대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항일운동 이었던 것이죠.
왜 나주일까?
그렇다면 왜 사건의 발단이 광주가 아닌 나주였을까요?
당시 광주에는 광주고보, 광주여고보가 있었는데 나주의 학생들은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통학 수단으로는 목포에서 출발해서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기차를 이용했는데, 이러다 보니 목포와 나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 간에 심심찮은 신경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굉장히 부유한 집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한다... 실제 그 사건의 주역(?)인 박준채 선생님 등의 나주 학생(여학생 포함)들은 지역 유지(?)의 자손들이었습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어려워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겠습니다. 특히, 그날(1929년 10월 30일) 우연찮게 일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를 잡아채는 장난을 치고 이에 욱해서 나주 출신 광주고보 학생이 주먹다짐을 벌이고 이게 확대돼서 광주의 조선인 학생과 광주의 일본인 학샏들이 광주에서 집단 싸움을 벌이는.... 아주 우연찮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민족독립운동으로까지 발전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쌓이고 쌓인 감정이, 독립의 열망이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우연찮게 일어난 사건으로 폭발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린 나주의 역사와 당시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라도는 전북의 전주, 전남의 나주를 합친 말로서 나주는 조선시대까지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인 '목'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전남의 핵심도시가 광주이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전남의 핵심도시는 나주였습니다. 광주는 일제가 나주 대신 집중적으로 육성한 신도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제는 나주를 배척했을까요? 나주는 구한말 단발령을 거부하고 의병을 일으킨 곳입니다. 일제가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곳이죠. 그래서 나주 바로 옆 광주를 전남의 핵심도시로 삼고 도청소재지로 지정합니다.
천년 목사골 나주는 쇠퇴합니다. 더군다나 나주평야의 쌀이 일제에 의해 수탈되어 영산포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죠. 이런 모습을 당시 10대인 중, 고등학생들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또한 학생들은 독서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조국을 잃은 슬픔과 독립운동의 싹이 움트게 되고 당시 신간회라는 독립운동 단체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소개합니다.
기념관은 2개의 층으로 되어 있어 있습니다.
먼저 2층으로 올라가 1 전시실을 관람하고 내부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와서 2 전시실을 관람하는 순의 동선 흐름이 되겠습니다.
2층 1 전시실은 일제강점기 하 연표를 소개한 후 왜 나주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사건을 소개합니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마자 라운드 형태의 공간에 일제강점기 연표를 소개하고 다시 전시실 내부로 이동합니다
전시연출적으로 특이점을 한 가지 소개해드린다면, 아래 2장의 사진을 보시면 배경 연출(정면의 구 나주역)은 같은데 좌측의 그래픽과 인물 연출이 다른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2층의 맨 마지막 코너 전시부스이고, 두 번째 사진은 1층의 시작의 전시부스입니다.
건축 구조 상 2층을 보고 내부계단을 내려가서 1층을 본 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공간 구조가 2층 마지막 코너와 1층 시작 코너가 같습니다. 이를 전시연출에 착안해서 같은 일제강점기 나주역 공간인데 다른 2개의 사건(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1929년 10월 30일 일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 장면은 이후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집단 싸움을 한 후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 다른 사건의 전개.
어찌 보면 우리도 매일 살아가는 같은 공간에서 매번 다른 사건이 전개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건은 장소성과 항상 연결이 되더라고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과 무엇을 하는지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부터 1층 전시실입니다.
1층 전시실은 그날 그 사건 이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소개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당시의 학생 통학열차 노선도, 열차 내에서의 학생들의 모습 등을 모형과 그래픽 그리고 관련 사료와 함께 소개합니다.
통학열차 내부를 절개해서 1:1 인물모형으로 연출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
통학기차 내에서의 다툼을 소개하는 축소모형
당시의 학생들의 교복, 관련 사료, 참여했던 학생들의 명단 등을 소개합니다.
공간 연출 인테리어 역시 나름 소소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건축의 기둥에 설명 패널을 부착했는데, 그 앞에 철제 와이어 매시로 구조물을 이중으로 연출한 후 그 앞에 다시 설명 패널을 부착했습니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갔혔을 때 감옥의 철창을 모티브로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벌써 14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적어봤습니다. 제가 소개드린 내용은 기념관의 일부이므로 혹 전라남도에 여행 가실 일이 있거든 구 나주역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꼭 둘러보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유난히 이 프로젝트를 통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나주시청의 김종순 팀장님, 임은숙 주사님(지금은 승진을 많이 하셨겠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특히 프로젝트 진행 중간에 임은숙 주사님께서 저에게 서울에 있는 본인의 조카를 소개팅해주시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렇게 좋게 봐주셨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넘쳤던 프로젝트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전시 스토리와 설명 패널 문구, 영상 시나리오 등 전체적인 내용을 자문(검수)해주신 박찬승 교수님(한양대학교)도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위 사진은 임신영 작가님의 블로그 [나주여행]시간여행/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있는 사진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준공사진을 쓰려고 했으나 작가님의 사진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사용을 하게 됐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얼른 다른 사진으로 교체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양해 부탁드립니다.
역사의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한 곳, 홀로코스트 뮤지엄
살짝 다른 이야기이지만 꼭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첨삭합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미국 워싱턴에 가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뮤지엄'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던 유태인을 추모하고 기리는 박물관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아래와 같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1939~1945) 동안 나치 독일에 의해 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을 의미한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번제(燔祭)’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으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올라(olah)’로 표현되었던 ‘번제’는 70인 역 그리스어 성경에서 ‘홀로카우스토마(holocaustoma)’로 번역되었다. 이후 라틴어 불가타본 성경을 거쳐 영어 성경으로 이어지면서 정착된 ‘홀로코스트(holocaust)’는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발표된 외신 기자들을 위한 선언문에서 유럽 유대인의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차용되었다. (출처 - 역사용어사전)]
어찌 보면 우리의 독립기념관이나 오늘 같이 공유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분위기나 관람객의 태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제가 2009년에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건으로 미국에 벤치마킹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을 돌았는데 그때 워싱터에서 이곳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프로젝트를 하면서 유사사례를 서치 하다가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알게 됐고 책자를 사서 보면서 공간 연출에 참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길래 '아. 사진 속 박물관을 실제로 보는구나'라는 정도의 생각을 안고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입장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공항 검색대처럼 관람객의 모든 소지품을 검색하고 입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사진 촬영 금지라는 조건도 있었습니다. 우린 사진 찍으러 가는 건데....
그리고 또 특이한 건 관람객이 무척 많았다는 것. 특히 유대인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줄을 지어서 관람한 다는 것이 특징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을 하는데...
저는 순간 사진기를 꺼내기는커녕 숙연해지고 숨 쉬기 조차 힘들게 관람을 하게 됐습니다.
왜냐면 줄지어 관람하는 학생들, 인솔자 어른들이 계속 눈물을 훔치면서 훌쩍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전시관 연출은 주로 기록사진, 그리고 당시 유대인으로 학살당했던 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등이 가득 쌓여있는 감성적인 연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기록사진 속의 인물들... 불과 100년 전 사람들 아닌가.. 그럼 지금 여기에 있는 유대인 학생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겠는가...
아니지. 우리가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저 사진 속의 인물이 나였을 수도... 저 수북한 신발이 나와 내 가족의 것일 수도...
이런 생각이 드니 훌쩍이는, 울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가게 됐습니다.
전 조용히 일행과 떨어져 (일행과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시연출, 인테리어 마감재 얘기를 하게 되니...) 혼자 관람 코스대로 관람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몰래 사진도 찍지 않고 내 마음속에만 담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유대인의 힘과 저력인 것 같습니다.
선조들의 아픔을 후손에 남기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 장소가 이스라엘이 아닌(물론 이스라엘을 포함해 전 세계의 다수의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있음)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이렇게 크고 웅장하게 지을 수 있다니...
마치 독일인을 포함하여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봐라 우리 선조들은 이런 희생을 당했다. 봐라...라고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돈이 있다고 워싱턴 한복판에 자국의 추모기념관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경제대국 10위라고 미국 워싱턴 중심가에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힘을 유대인들은 미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가졌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힘겨루기와 그에 따른 수많은 아픔과 상처는 여기서 논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세운 추모기념관. 거기를 성지 순례하듯 꼭 방문해서 기억하고 눈물 흘리는 이스라엘 국민들.
우린 어떤가요.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기도 합니다. 왜 학생의 날을 11월 3일로 했냐면.
맞습니다.
일제강점기 하 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그날을 학생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