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새벽일기

픽션

글감 받아먹기 3

by 글쓰는 최집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귀를 의심했다. 지금 누군가 내 기표소에 쳐들어와서 내 귀에 대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 한 것이 현실인가? 놀라 뒤를 돌아보니 요상하게 생긴 안면보호 모자를 쓴 남자가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기표함의 가림막을 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에요.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놀란 마음에 불쾌하고 어처구니 없는 내 심정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주눅든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여전히 삐딱하게 선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시면 안 된다고요."

"뭐가요?"

"지금 안 찍고 접었잖아요. 여기서 이러심 안 되죠."


그는 건성으로 내가 접던 투표용지를 가리켰다.

뭐라고? 지금 내가 무효표를 행사하는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거야?


"저기요. 투표소에 와서 투표하는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뇨? 제가 1번을 찍든, 2번을 찍든, 안 찍든 무슨 상관이에요?"

"투표소에 왔으면 투표를 하셔야죠."

"하잖아요 투표! 꼭 누굴 찍어야 투표에요? 인명부 확인도 했고 투표용지도 받았다구요!"

"하지만 아무도 찍지 않았잖아요."

"그거야 내 맘이죠! 무효표를 행사 할 수도 있는거잖아요!"

"그럼 여기 오지 말았어야죠."

"뭐라고요? 잠깐, 지금 내가 아무도 안 찍는거 어떻게 알고 쳐들어온거에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초등학교 때도 배우는 선거의 4대 원칙 중 비밀선거의 원칙을 어기고 지금 이 이상한 아저씨가 내 선거를 방해하고 있다. 나는 내가 기표소 안에서 하는 행위를 들켰고, 아무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켰다. 그것을 깨닫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거칠게 밀치고 기표소 밖으로 나갔다.


"저기요! 여기 이 아저씨가 지금 제 기표소 안으로 쳐들어 왔어요! 제가 아무도 찍지 않았다면서요! 이거 불법아닌가요!"


누구에게 말해야 할 지 몰라 허공에다 대고 지껄였다.

화가 난 채 막 소리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투표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있다. 놀란 표정도, 동요하는 표정도 아니다. 그저 나를 보고있다.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이.


"안 들려요? 이 아저씨가....!"


내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데 '이 아저씨'가 다가왔다. 그리곤 내 손에 든 투표용지를 빼앗는다.


"보세요. 아무도 찍지 않았어요."


그가 내 투표용지를 높이 들어보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근거린다.


"자. 얼른 찍고 나오세요."


그가 다시 종이를 내게 들이밀며 말한다. 이건 꿈일거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에요? 이건 제 선거권 침해라고요! 찍을 사람이 없어요! 인물이 없다고요! 그래서 빈 종이를 내겠다는데 왜 이러는거에요? 아니, 아무도 이 사람 안 잡아가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누구도 이쪽을 보지 않고 있다.

관리위원들은 사람들의 선거인명부를 획인하고, 용지를 나누어준다. 유권자들은 그저 차분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참관인들은 정말 참관만 한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분주하다. 기표함 앞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누군가에게라도 제대로 말해야 한다. 이건 내 선거권 침해라고.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봐요. 왜 아무도 제 말을 안 들어요?"

"저기요, 좀 물러나세요. 그 마스크 제대로 쓰시고요."


그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턱에 걸쳐놓은 내 마스크를 가리켰다.

한 마디 하려는 찰나, 다시 아저씨가 다가와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당장 들어가서 투표하는게 좋을거에요."


나는 순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은 내 투표용지를 기표함으로 구겨넣었다.

내가 보란듯이 아저씨를 향해 미소를 짓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어딘가를 향해 손짓한다. 아냐, 이건 꿈일거야.

멀찍이서 제복을 입은 형사 둘이 다가온다. 그와 같은 이상한 안면보호 모자를 쓰고, 비닐장갑을 끼고 있다. 다른 점은 제복을 입었고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지만, 두 사람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 경찰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글쓰기 좋은 질문> 중

"당신이 쓴 글 가장 마지막 문장을 새로운 글의 첫 문장으로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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