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해부학 10
Donde Voy, 어디로 가야 하나? 스페인어 노래다.
멕시코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던 난민들이 국경 수비대에 쫓기는 심경을 읊은 노래라고 한다.
요즘 자주 듣는다.
내 입장에서 이해 못 할 상황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찾는 게 과거 역사, 혹은 외국의 사례다.
눈앞에 펼쳐지는 온갖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이며 몰염치, 무원칙, 극단적 이기주의… 분노, 적개심, 시기, 질투… 권태, 불만, 조바심, 허무… 이들의 원천은 무엇인가?
내 기억에 4.19. 5.28, IMF 때도 이러진 않았다.
6.25 때 이랬을까?
일제 치하에서는?
임진왜란 때?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1,2차 세계 대전?
대공항?
독립전쟁?
프랑스혁명?
흑사병 창궐?
내 재주론 그 당시의 사회 현상이 오늘 우리 같았는지, 더 심했는지 역시 알 길이 없다.
하면, 오늘 우리의 이 대 혼란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중학교 때 잠시 단거리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기억나는 코치 선생의 이야기 중에 100미터를 달리더라도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에너지를 고갈시켜야 한다는 대목이다.
전쟁의 폐허로부터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을 불과 70년 만에 달려왔다.
유래가 없는 신기록이다. 숨이 넘어갈 듯한 가쁜 호흡이 멈춰 지질 않아서, 그래서일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유튜브의 사용이나 점유율이 세계 1위란다.
유사 이래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 세상으로의 급격한 전환에 따른 후유증일까?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쨌든, 문제는 학문이 작동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학은 진단에 실패하고 인문학은 처방전을 내질 못한다.
우리 모두가 새벽에 눈뜨자마자 코를 박고 있는 유튜브, 텔레비전, 스마트폰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사태를 날로 악화시켜 나갈 뿐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시사건, 드라마건, 토론이건 심지어 오락이건 간에 하나같이 문제만 양산한다.
난들? 혹은 넌들?
오래전에 읽은 이오덕 교감선생이 쓴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이 떠 오른다. 그 아이들이 오늘 우리가 된 것이다.
하여 우리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