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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양 Dec 29. 2021

[책] 조반니의 방(Giovanni's Room)

#12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알게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줄거리>

 데이비드는 고향인 미국을 떠나 파리에서 지내고 있다. 한 술집에서 헬라를 만나 연인이 된 후 데이비드는 문득 청혼을 한다. 헬라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혼자 파리에 남은 데이비드는 '게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바를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바텐더로 일하는 이탈리아인 조반니를 만난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조반니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 마침 월세를 낼 돈이 부족해진 데이비드는 파리 외곽의 조반니의 방에 얹혀 살기 시작한다.

 조반니의 방에 살면서 데이비드는 조반니를 향한 애정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조반니의 삶은 불안정하다. 조반니는 가난할뿐 아니라 이탈리에서 온 외국인인데다가 일하고 있는 바의 주인인 기욤이 자꾸만 조반니에게 치근덕대면서 권력형 성추행을 자행한다. 조반니의 아슬아슬한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던 데이비드는 조반니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과 조반니가 맺고 있는 관계를 두려워하고 달아나고 싶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페인 여행 중이던 헬라에게서 청혼을 수락하겠다는 편지가 오고, 데이비드는 조반니에게 말도 없이 헬라를 마중 나간다. 그는 며칠 동안 헬라와 지내다가 겨우 조반니의 방으로 돌아간다. 데이비드가 자신의 곁을 떠나리라고 감지한 조반니가 제발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며 애원을 한다. 그러나 결국 데이비드는 조반니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헬라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며칠 뒤, 조반니가 기욤을 목졸라 살해했다는 뉴스가 파리 전역을 뒤덮는다. 그리고 몇달 후 조반니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데이비드는 조반니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으로 헬라와도 멀어진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데이비드는 다시 남자를 찾고 헬라에게 그 사실을 들키게 된다. 헬라는 데이비드를 떠나버리고, 데이비드는 조반니가 사형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파리를 떠나게 된다.

<끝>



<감상평>


-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조반니의 방'은 195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을 쓴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파리에서 오래 살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창작무대로 선정되었던 것같다. 제임스 볼드윈은 1924년 미국 뉴욕의 할렘에서 태어났으며 약물 중독자인 생부와 헤어진 뒤 목사와 재혼을 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목사였던 양부는 백인을 매우 배척했으며 자식들에게 영화와 재즈 감상도 금지하는 등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이런 유년시절의 환경과 더불어 흑인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은 볼드윈 인생의 커다란 숙제이자 그의 작품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가 되었다. 볼드윈은 평생동안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그는 미국사회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주류가 아니었고, 흑인사회 내에서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이중 억압은 볼드윈으로 하여금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정착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1948년 프랑스에 정착한 뒤 거의 인생의 반 이상을 파리에서 보낸다.  


 볼드윈은 프랑스 정착 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해 '조반니의 방' 이외에도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등등의 여섯편의 장편소설을 썼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영화화 되거나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특히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수상할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볼드윈은 시나 희곡, 에세이를 남기기도 했다.


- 인물 해석: 데이비드


 데이비드의 내면은 마치 볼드윈의 내면을 보는 것 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부분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문장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나는 특히 이 책 '조반니의 방'을 읽으면서 이런 순간들을 다른 소설들보다 더 자주 발견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제임스 볼드윈이 흑인이자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인생의 혼란에 대해 독백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에서 작가가 많이 겹쳐보였다. 데이비드의 입을 빌려 표현하지만 결국은 볼드윈의 생각과 경험인 것이 분명한, 인간의 심리를 향한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고뇌가 많이 엿보인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아버지와 고모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가끔 듣는 것이 전부다. 어머니는 거실 속 사진 액자 속의 얼굴로 존재할 뿐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버지와 고모는 데이비드가 '제대로 된 남자'로 자라길 바라고 있다. 이들은 데이비드를 사랑하지만 데이비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저들 자신의 인생조차 불안정하다. 데이비드는 아버지를 이해해보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아버지 또한 데이비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를 꺼린다. 데이비드는 점차 아버지와 멀어지면서 진실한 자신이 아닌 겉으로 꾸며낸 모습만을 내보이게 된다.

(p35) 아버지는 내가 성장함에 따라 부자 사이가 가까워지기를 기대하는 듯했지만, 막상 아버지가 나에 대해 알아내고자 하자 나는 도리어 아버지에게서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알아주기를 <전혀> 원치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모르길 바랐다.

(p42) 당연하게도 나는 집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아버지를 한결 수월하게 대할 수 있었고, 내 삶에 대해 아버지에게 이야기할라치면 얼마든지 그분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해줄 수 있었으므로 아버지로서는 내가 자신을 내 인생에서 배제시켰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사이는 정말로 꽤 좋아졌다. 내가 아버지에게 들려주는 거짓된 인생 이야기를 아버지가 정말로 믿어주기를 나는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데이비드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건 청소년 시기다. 조이라는 또래의 남자애와 함께 첫경험을 경험하게 된 그는 동성애자로서 온연히 경험하는 순간이 얼마나 자유롭고 꿈같은지 인지하면서도 어릴 때부터 사회와 가족에게서 끊임없이 주입받은 관념때문에 본인의 육체와 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끝끝내 진실을 거부하고 만다. 조이와의 만남 이후부터 데이비드는 끊임없이 육체로부터의 탈출구를 갈망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결코 두려움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p20) <조이는 남자잖아.> 이 생각이 점점 명료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허벅지와 팔과 느슨하게 말아 쥔 주먹에 깃든 힘이 눈에 보였다. 그 힘, 미래 그리고 신비 때문에 갑자기 겁이 났다. 그 몸이 갑자기 시커먼 동굴의 입구로 보였고, 그 안에서 나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미쳐버리고 남성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 몸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 힘을 느끼고 나를 통해 그 미래를 실현시켜 주고 싶었다. 등에 맺힌 땀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났다. 수치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외면하며 살아온 데이비드는 항상 진짜가 아닌 삶 속에서 권태를 느끼고 자꾸만 진실한 자신과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된다.

(p45) 결국 그 동안의 내 삶은 돌아다니는 데에도 지치고, 즐겁지도 않으면서 술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데에도 지치고, 서로 털털하고 솔직담백하고 호쾌하게 대하지만 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친구들과의 관곙도 지치고, 절박한 처지에 있는 여자들의 숲을 헤매고 다는 데에도 지치고,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하는 노동에도 지친 채, 그 모든 권태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과 다름없었다. 우리 미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마따나 나는 내 자아를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제임스 볼드윈이 미국에서 흑인동성애자로서 억압을 느끼고 파리에 정착해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듯, 데이비드 역시 파리에 도착한 뒤로 조금 더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돈많은 중년 동성애자인 자크와 친구가 되어 어울리기도 하고, 기욤이 운영하는 게이바에도 비교적 쉽게 드나든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성을 공포스러워하고 혐오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섹스를 위해 젊은 남자를 돈으로 '후리고' 다니는 자크나 기욤의 존재를 마냥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경멸한다.

(p48) 자크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다. 바보인 데다 겁쟁이인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그 둘 중 하나이고 대부분은 둘 다에 해당하지 않던가. 어떤 면에선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어리석었지만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 느꼈던 경멸은 나 자신에 대한 경멸을 아우르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지내면서도 데이비드는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여전히 사회관념에 속박되어 잠시라도 사회적으로 정의된 '남성성'의 특징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한다. 자크의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자네의 그... 자네의 자랑이자 기쁨인, <한 점 흠도 없는> 남성성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도도 없어."라는 대사에서도 데이비드가 얼마나 철옹성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지키려고 드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기욤의 바에서 운명처럼 조반니를 만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이 그토록 치부로 여기고 숨겨왔던 자아를 조금은 내보이게 된다.

(p87)  그렇게 나는 조반니를 만났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후에 나는 그와 별거 상태에 들어갔고 이제 곧 조반니는 파리 근처의 부정(不淨)한 땅속에서 썩어 가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데이비드를 잡아먹은 육체의 진실을 향한 두려움은 조반니를 만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있다. 조반니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면서도 데이비드는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무서워하고 회피한다. 자크는 이런 데이비드에게 <삼촌>처럼 다가와 진심어린 충고를 하기도 한다.

(p114) "그가 말하는 우정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은 드나 보군. 그것 때문에 자신이 바뀌어 버릴까 봐 두려운 거지. 그러면 자네는 이제까지 어떤 종류의 우정을 나눠 봤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의미에서, 또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해봤나?"
 나는 한참을 묵묵부답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자크가 나를 놀렸다.
 "나와(Come out), 나오라고. 어디에 있는진 몰라도!"

*come out : 커밍아웃하다.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힐 때 쓰는 말.


 조반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데이비드는 스스로를 극복해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조반니가 얼마나 위태롭고 가련한 인생을 사는지, 그리고 본인 자신도 그런 조반니를 동정하고 욕망하는지 알면서도 데이비드는 조이를 내버려두고 떠났듯이 조반니를 떠나게 된다.

 

 조반니를 떠나 헬라와 결혼을 결심하지만 그건 자신의 남성성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발버둥일 뿐, 데이비드는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유리되었다고 느끼며 더 나아가 헬라와도 제대로 된 인생(남들처럼 아이를 낳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죽음을 앞둔 조반니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남성성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나서도, 종내에는 진정한 자아를 인정할수도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p330) 나는 내 성(性)을, 나를 괴롭히는 성을 바라보며, 그것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이씅ㄹ지, 칼날 아래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무덤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부패로 가는 여정도 시작되었다. 이미, 언제나 절반은 진행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를 구원할 열쇠는 내 육체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이 비록 내 몸은 구원하지 못할지라도.


- 조반니의 방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왜 '조반니의 방'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조반니의 방은 근본적으로 데이비드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책 2부 2장 초반에 나오는 조반니의 방에 대한 묘사를 보면 데이비드가 조반니를 만난 것이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잘 알 수 있다.

(p165) 그 방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후로 내가 들어가 본 방, 머물러 본 방은 모두 조반니의 방을 연상시키게 되었으니 말이다. 봄이 되기 전에 그를 처음 만났고 여름에 그곳을 떠났으니 그리 긴 시간을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그 방에서 평생을 보낸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든 그 방에서는 삶이 바다 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고, 산이 바다로 변하듯 급격한 변화가 내게 일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데이비드는 조반니의 방에 살면서 조반니라는 사람의 삶에 자연스레 침투하게 된다. 누군가의 방을 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상세한 면면을 살펴보는 것과도 같은데, 사람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고, 내밀한 사생활이 일어나는 공간이라는 점이라는 걸 상기해보면 그 사람의 삶을 알게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타인의 방에서 보는 것은 아주 친밀하고 서로의 내면을 내보일 수 밖에 없는 행위다.

(p168) "이 도시의 쓰레기들을 봐. 저 온갖 쓰레기들, 저게 다 어디로 갈까?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파리 사람들은 저걸 다 내 방에 가져다 쌓아 놓는 것 같아."
"설마. 차라리 센강에 던져버리겠지."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었다. 그런데 이제 조반니의 방에서 깨어나 방 나을 둘러보노라니, 나는 그때 그가 썼던 비유가 허세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소심한 표현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방에 있는 것들은 파리에 널린 익명의 쓰레기가 아니었다. 이건 조반니가 토해낸, 조반니 개인의 삶이었다.


 조반니는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으로 데이비드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지만 반대로 데이비드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부담스러워한다. 조반니는 끊임없이 데이비드와 소통하고 감정 교류를 하고 서로의 삶이 엮이길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 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데이비드가 조반니의 삶을 구원할리가 무방하다. 그는 조반니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심지어 그의 불행마저도 알아채지만 자신을 내주지는 않는다. 금방이라도 도망갈 수 있게 한쪽 발만 걸친 채 조반니를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는 무()행위의 상태에 머무른다.

(p170) 나는 조반니가 왜 나를 원했는지, 어째서 이 최후의 피난처로 나를 데려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내가 이 방을 파괴해 주고 그에게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건 즉 나의 삶일 수밖에 없었고, 조반니의 삶을 바꿔주기 위해서는 우선 내 삶이 그 방의 일부가 되어야만 했다.

(p224) 이 차가운 초록빛 지구 위에서 그를 걱정하고, 그의 말과 침묵을 이해하고, 그의 팔을 알고, 품속에 칼을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어다. 그를 구원하는 일이 내 몫인 것 같았고 나는 그 부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명언처럼 사람의 관계도 비슷하다. 내가 타인의 내면을 바라보고 알아갈수록, 타인 역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데이비드가 조반니의 방에서 그를 들여다봤듯이 조반니 역시 데이비드의 진심을 어느 정도 엿본 것 같다. 조반니는 데이비드가 애초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끌어안아줄 수 없다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뿐. 조반니의 삶도, 데이비드의 삶도 서로에게 버거운 것이었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충분히 예상가능하듯 비극의 끝으로 치닫게 된다.

 (p228)그는 한참 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가끔 보면, 당신은 말이야, 교통사고를 피하려고 감옥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아."
(p231) 나는 벽돌을 떨어트리고 그에게 건너갔다. 그 즉시 조반니의 손에 있던 벽돌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순간이면 우리는 그저 보통의 살인보다 덜 중대하고, 더 오래 걸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살인 행위를 서로에게 저지르고 또 당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이미 관계의 끝을 짐작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빨리 벗어나고자 한다. 데이비드가 조반니와 관계를 계속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데이비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고 평생을 죄악시여겨왔던 육체를 인정하는  밖에 없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조반니와의 관계가 발전해나갈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데이비드는 나약하고 공포에 허덕이는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이 난생 처음으로 만난 사랑 앞에서도 문제를 회피하며 상대가 상처받도록 방관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느껴. 아무것도. 난 단지 이 방에서,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이 아수라장을 끝내고 싶을 뿐이라고."


- 소감


 솔직히  소설이 단지 허구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데이비드를  맹렬하고 날카롭게 비난하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라는 보수적인 시대 배경과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겪어왔을  고뇌가  소설에서 너무  드러난 탓에 함부로 등장인물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유려한 문체와 당시 파리 동성애자들의 생활상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점이 좋았다.

 제임스 볼드윈의 다른 장편들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꽤 마음 깊이 다가온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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