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끼리 싸우는 장면이 나오자, 네 살배기 딸 번개가 무섭다고 으앙 울어버렸다. 쌍둥이 오빠 천둥이는 태연한데, 딸은 무척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이를 다독여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물어보았다. "많이 무서워?"라고 하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과 폭력은 네 살 아이가 소화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네 살이 무언가. 아무리 청소년이어도, 성인이어도, 인생 경험 풍부한 할아버지 할머니여도 눈앞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태연하게 바라보고 넘어갈 수 없다.
번개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후로, 트라우마를 새롭게 개념화했다. 트라우마는 자기 나이에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4세는 4세 관람가 사건만 경험해야 하는데, 자기 한계를 넘는 사건을 경험하면 트라우마를 겪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내 한계를 넘는 폭력 장면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당시 나를 만난다면, 지금 내가 번개에게 하듯이 해줄 테다. 눈을 가려주고 귀도 꼭 틀어막아줄 테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은 네가 관람할 사건이 아니라고, 네가 억지로 볼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고 네 잘못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해줄 테다. 아이를 번쩍 들어서 침대에 누이고 함께 뒹굴거릴 것이다. 다른 영화를 보겠다고 하면, 연령에 맞는 영화를 함께 고를 것이다. 누구나 자기 연령에 맞는 인생을 경험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