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야 쫄지마

동지가 생기다

by 쌀집아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계를 돌아 다녀볼수록 나란 존재는 너무도 하찮아서 이 광활한 우주에서 딱! 티끌 하나 정도의 존재가 아닌가 하고.(생각해보니 아닌 게 또 아니지만...) 그래서 얘기해주고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행성에게 여기 나란 애가 존재한다고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고 싶었다.


12월 어느 날. 꽤나 쌀쌀한 날이었지만 생각지 않게 저녁을 야무지게 먹은 터라 그득한 배를 꺼트려 보겠다는 목적 의식에 겸하여 낭만 있게 한강 둔치를 거닐어 볼 요량으로 걸음을 나섰다. 또한 걷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기도 하니 걷는 다는 건 안팎으로 다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좋은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고...(과연 그런 것 같다.) 거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어 볼륨을 적당한 수준으로 높이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 소음이 사라지며 나와 세상과의 결계가 쳐지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채로 걸어 다니는 건 약간 위험한 짓이긴 해도 꽤나 멋진 기분에 들 수 있다는 건 확실하다.


어느덧 한 해가 또 지나가려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맘때가 되면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연말이라는 데에 대한 아쉬움과 부담감, 또 한 구절 넘어갈 세월에 따른 의무감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아...새해에는 정말 기록적인 일 한 가지는 해보고 싶은데...’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일 중 하나를 이루고 싶었다. 인생에 진~한 기록이 될 만한 일을 하나 해야만 했다. 결혼 말고...^^;; 나이에 맞게 이루어야 할 일, 세월에 맞게 거두어야 할 것들에 대한 중압감이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억지로 얼굴을 돌리고 모르는 척, 태연한 척 외면하려 애썼고 그리곤 내가 해야 할 일 보단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일에 더 바짝 다가가려 기를 썼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새해에는 해외 버스킹을 가봐야겠다. 더 미루면 영영 못할 것 같애. 맞아! 확실히... 미루면 이제 내 인생과는 영영 빠이빠이야.’ 몇 해 전부터 생각만 해오던 나의 버킷리스트 일순위에 올라있는 일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며 열심히 놀고 여행을 많이 다니려 애썼다. 어지간히 여행을 다니다보니 ‘와~ 좋다!’ ‘와~ 맛있다!’ 하는 그저 놀고 먹는 여행은 좀 밍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을 찾아 가고,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생활을 즐기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지만 무언가 능동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고 아무리 해도 겉만 핥는 다는 느낌이었다. 속으로 파 들어가고 싶었다. 지나가는 게 아니라 여행지 안으로 더 들어가고 싶었다. 더! 더! 그리하여 그 공간으로 녹아들어 가는 느낌, 그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 여행지에서 그곳에 콱! 박힌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흐릿하고 어렴풋하던 갈망이, 흐물흐물하고 물렁물렁하던 생각이 조금씩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다 어느새 하나의 위용을 갖춘 덩어리를 이루며, 이것은 확실히 저녁때 많이 먹은 밥 때문이 아닌...형체는 없으나 기운은 명확한 그득함이 명치에서부터 혀뿌리까지 차올라 왔다. 벅찬 그득함을 안고 한강 대교를 향해 걸어가며 다짐을 했다. 아니 다짐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다. 혼자선 할 수 없다. 쫄보인 내가 혼자 준비는 해도 혼자 실현할 용기는 없었다. 함께 할 사람, 뜻을 함께 할 동지가 필요했다. 다행히 편협한 인간관계를 가진 내게 동지로 떠올릴 만한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았다. 고민할 소스가 없었다. 두 사람을 떠올렸다. 나의 이런 지극히 재미에 치중된 뜻에다 의미부여까지 하며 좋다고 나눌만 하며 적당히 한가한 사람. 이상민, 장재영. 이 사람들이 아니면 같이 할 사람 없다. 확실했다.

먼저 동갑내기 친구인 재영이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다지 손이 시리진 않았다.


- 어이 태한~

- 어이 재영이~. 머하냐? 밥 먹었냐?

- 어 먹었지.

- 어디? 인천이여?

- 어.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거기 와있어.

- 여자들이랑?

- 아니 고등학교 친구들. 남정네 네 명이야. 의미 없는 연말 모임하고 있어.

- 너 아까운 연말 시간을 그런데 쓰고 말이야. 여유 있네.

- 그러게 말이야. 이럴 때가 아닌데 말이지. 넌 머해?

- 난 운치 있게 한강 걷고 있다.

- 멋지네. 낭만 가이야. 연말엔 낭만 찾아야지.

- 인생 낭만이지. 야 그런 의미로다가 내가 전에 해외 버스킹 얘기한 거 기억나나? 내 버킷 리스트라고 하면서...

- 아~~ 기억나지. 버스킹. 아주 멋진 생각이야.

- 혹시 니 같이 할 생각 있나? 확실하게...내년에?

- 그래? 나야 좋지. 좋아 좋아.

- 진짜로? 해외로 가는 거라 며칠 시간 필요할 것 같은데 시간 뺄 수 있겠나?

- 어. 시간 빼면 뺄 수 있어. 언제 그런 걸 해보겠어?

- 오~ 그래그래. 같이 하면 진~짜 재밌을 꺼다. 내 생각에 지금이 딱 타이밍인 것 같다. 좀 지나면 못 할 것 같고.

- 그래. 재밌을 것 같애. 해외 버스킹이라니. 좋아 좋아!

- 이야~~ 의외로 너무 쉽게 오케이해서 당황스럽다야. 좀 긁어야 될 줄 알았는데.

- 아니야. 전에 니 얘기 듣고 나도 해보고 싶단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근데 머 쉬운 일이 아니니까 생각만 하고 있었지.

- 오키 오키. 상민이형한테도 얘기 할 꺼거든...아마 형은 한다고 할 거야. 그런 이벤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게...내가 연락할 테니까 셋이 언제 한 번 만나서 얘기하자.

- 그러자 그래.

- 좋아 좋아. 의미 없는 연말 모임 잘하고 삐뚤어지게 먹고 들어가라.

- 어. 너도 입 돌아가기 전에 들어가라.

- 그려 연락할게 놀아라~

- 어이~~


상황에 대한 설득의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 달리 선뜻 동참하겠다는 재영이의 말에 반가움과 고마움마저 느꼈다. 재영이와를 통화를 끝낸 후 곧 바로 상민이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왠일이야?

- 형 지금 전화돼요?

- 어. 얘기해.

- 전에 제가 버스킹 얘기한 적 있잖아요. 동남아 쪽에 나가서 하자는 거. 그거 내년에 한 번 해보면 어때요? 되도록 빨리...방금 재영이랑 얘기했는데 재영이는 한다네. 형 어때요? 이제 우리도 조금만 더 지나면 할 사람이 없어서 못해. 지금 사람 구해질 때 같이 해야 돼.

- 나야 좋지. 하자.

- 오키. 이거 우리 조금 더 지나서 누구하나 결혼이라도 하거나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진짜 하기 힘들어지는 거거든. 지금 시간이랑 사람 있을 때 해야지 아니면 영영 끝이야.

- 맞아. 사실 나도 이제 거의 마지노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짜 지금 아니면 힘들 것 같애.

- 오키 오키. 그럼 진행합시다. 재영이랑 세 명 모였으니까 더 미루지 말고 착착해서 딱딱 해치웁시다. 더 늘어지면 진짜 빠이 빠이일 듯.

- 그래 하자.

- 네 형. 그럼 조만간 셋이서 한 번 봅시다. 연락 할게요.

- 그래.


역시 이들은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씩 외국으로까지 나가서 해야 하는 일에 게다가 돈이라곤 안 되는 지극히 재미 추구 일로의 일에 이렇게 쉽게 동참 해준다하니...전화를 끊은 후, 내가 직접 통화를 했음에도 고개가 갸우뚱 해지고 혹시나 지나가는 말로 생각하거나 너무 쉽게 생각하고 대답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약간의 못 미더운 감정이야 어찌됐든 이들이 아니었으면 혼자서 궁리만 하다 날려 버렸을 생각이었다. 협소한 인간관계 중에서도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을 찾고 나니 말 그대로 동지(同志)가 생긴 듯하며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응, 확실히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