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표를 끊다
이튿날, 나는 그들이 내게 보여 준 지난밤의 결의가 통상적인 낭만에 의한 순간적인 결심이 아니었을지...아니면 혹시나 밤새 다들 마음이 바뀌거나 어제 밤의 의지가 희미해져 버리진 않았을까 우려하는 마음을 살얼음 위에 조심히 올려 놓고 나와 재영이, 상민이형 이렇게 세 사람의 대화방을 만들었다.
- 다들 그 새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 무슨 소리...가야지
- 노노, 무조건 고고하는 거임
- 그래 이미 뱉은 말이다. 불입임
- 좋아 좋아!
- 그럼 가장 중요한 장소를 정해 봅시다
- 오오 해외 버스킹이라니 벌써 설레이는군
- 멀리는 당연히 못 갈꺼고 동남아나 일본이 되겠지?
- 맞음. 근데 일본은 왠지 버스킹하기 눈치 보일 꺼 같음.
- 그렇다. 거긴 왠지 좀 어색할 듯
- 먼가 좀 자유로워 보이는 데는 동남아 쪽인 듯
- 그래 동남아 쪽이 왠지 좀 마음이 편해
- 먼가 자유로운 분위기일 것 같은 기대가...
- 나도 전에 라오스 갔을 때 현지인이 버스킹하는 거 봤는데 분위기 좋더라
- 방콕 어때? 배낭여행객들의 성지라 불리는 자유와 낭만이 넘친다는 곳
- 나도 거기 생각했었다. 여행객들도 많이 왔다 갔다 하고 좀 활발한 분위기라 편할 듯
- 한국에서 얼마나 걸리지?
- 5~6시간 정도?
- 동남아는 다 그 정도 걸릴 거야
- 그런듯
- 적당하네 그 정도면
- 됐네 그럼
- 그래 그럼 방콕으로 하자 왠지 어울려 버스킹이랑
- 그랍시다 방콕으로 고고싱
- 오키오키
비행 시간과 현지 물가, 분위기를 생각하니 자유와 낭만이 넘친다고 소문이 자자한 동남아를 하나 같이 떠올렸고 그 중 배낭여행객들의 성지라 불리며 자유로움과 활력이 가장 넘칠 것으로 기대되는 태국의 방콕으로 이견 없이 단박에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졌다.
그나마 비교적 시간이 남아 보이는 사람들로 꾸려진 무리였지만 그렇다고 쉬이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주로 한가했지만 그리고 상민이 형이 나 다음으로 한가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일과 대학원생으로서의 학업을 병행하는 재영이의 스케쥴은 우리만큼 낭창낭창하지는 않았다. 이왕지사 멀리까지 가는데 일정이 너무 짧으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현지에서 여러 가지 준비하는 시간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니 못해도 5일 정도의 여유는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1) 너무 이르지도 그렇다고 텐션 떨어지게 너무 멀지도 않은 시기로
2) 연휴와 주말이 가까워 일에 최소한의 지장을 주는 날짜로
이렇게 고려하다 보니 삼일절을 낀 주말로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이 날짜가 정해졌다. 주로 재영이의 상황이 고려되었다. 남자가 바쁘면 매력이 없다.
목적지와 날짜가 정해졌으니 이제 비행기표 예매만 남았다. 일정 안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만들기 위한 비행 스케쥴을 고르고 골라(생각해보니 별로 고를 것도 없었는데 그 땐 꽤나 이래저래 고심했다.) 2월 28일 밤 비행기를 타고 가서 3월 5일 오후에 돌아오는 스케쥴로 확정했다. 셋 중 가장 바쁜 재영이는 출발은 같이 하되 3월 5일 오후부터 일정이 있어 5일 새벽 일찍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했다. 역시 남자가 바쁘면 매력이 없다.
목적지와 구체적인 비행 일정까지 정했으니 이제 비행기표를 끊는 일만 남았다. 실질적으로 여정의 시작은 비행기표를 끊는 것부터가 아닌가. 그리고 여기까지는 누구나 말만으로도 아주 신나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과연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때까지도 약간 미심쩍어 하던 나였다. 결제 직전의 단계에서 완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나였다.
그러던 중 내 생각에 우리 셋 중 가장 결단력과 실천력이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상민이형이 먼저 티켓 예매를 했다고 알려왔다. 사진까지 올려가며...(놀라웠다 의외의 추진력! 과연 맏형다웠다.)
‘오 이럴수가, 진짜 가는구나.’ 그 때 보여준 형의 티켓 사진은 마치 사원이 내민 여행 기안서에 사장이 찍어 준 도장과도 같았다. 상민이 형이 이렇게 구체적이면서도 확고하게 무언가에 대한 의지와 결심, 결의을 보여 준 적이 있었던가. 알고 지낸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토록 또렷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힌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저가 항공 규정 상 환불받으면 손해가 막심한 비행기표로 보여준 형의 굳건한 다짐으로 내게 남아있던 일말의 망설임과 불안함이 바람이 꽉 찬 공을 발로 차 버린 듯 사라졌다. 어찌됐건 저 저가 항공 비행기는 안타면 손해다. 형은 어지간하면 손해를 볼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은 어지간하면 저 저가 항공 비행기를 탈 것이다. 결국 여행의 지름은 항공권 구매부터 시작이고 항공권을 지르면 여행은 시작되는 것 이다. 그 후 나와 재영이도 딱딱 티켓 예매를 마치고 인증샷을 올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무조건 직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