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으로 맞이하는 새해

by 쌀집아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12월 31일. 오늘의 한 해의 마지막이던 말던 삶은 개의치 않고 굴러간다. 그리고 결국 한 번은 왔다. 몸살이랄까...약간의 근육통과 복통, 설사...장염 인가보다. 어제 저녁에 현지에서 먹은 주스 중에 아보카도와 망고를 갈아서 준 주스가 있었는데 내 생각엔 그게 아무래도 잘 못 된 것 같다. 일단은 배가 아프다. 수양설 까지는 아니지만 설사를 벌써 여러 번 했고 어깨 부위가 욱씬 욱씬 아프다. 이건 근데 어제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좀 격렬하게 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깨도 어깨지만 팔이 아프다. 상박보다 하박이...그래서 긴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머라도 좀 감싸줘야 할 것 같아서...


헛배가 부르고 가스가 찬 것 처럼 배가 빵빵하다. 아 이건...난 때에 따라 배가 많이 부풀어 오르니까 좀 애매하다. 기운이 없고 몸이 무겁다. 어디를 나갈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다행히 자카르타는 딱히 둘러 볼 만한 데가 없는 것 같다. 나가볼 장소가 없다는 외적 요인과 나가볼 의욕과 힘이 없다는 내적 요인이 합쳐져 완전히 오늘 하루는 호텔방에서 뭉개고 있을 판이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밖에 시커먼 구름이 두텁게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이 오후에 비가 올 성 싶다.


자카르타에 사는 백수처럼 오늘 보내는 거지 머...자위적인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아주 적절해 보인다. 침대에 엎어져 뒹굴 거리며 책을 좀 봤다. 재밌다. ‘어라? 이 책이 이래 잘 읽히는 책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책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잘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재능도 재물도 부족함 없이 자라며 원 없이 살아 온 것 같은 사람의 유랑기...배알이 꼻려 좋은 마음으로 읽히지도 않을 뿐더러 딱히 재미도 없어서 억지로 억지로 읽어 내던 책이었다. 근데 오늘은 재밌었다. 작가의 글에 공감도 되고 얻어갈 만한 생각도 보이고 술술 잘 읽혔다. 좌우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침대 위에서 한 시간 가량을 읽었다. 몸이 안 좋아서 머리가 더 활발해 진 건가…

한동안 침대에서 책을 읽고 방 안의 테이블로 옮겨 갔다. 어느 호텔이나 조명이 딸린 테이블이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앉아 무언가를 해 본 적은 없던 그저 물건이나 올려두는데 썼던 공간이다. 이번엔 키보드를 펼치고 전등을 키고 의자에 앉았다. ‘오~’ 나름의 꿀잼...호텔방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도 재미있었다. 의외의 집중도와 몰입도가 있었다.


아 한동안 잘 놀았다. 조식을 꾸역꾸역 먹어서 그런 건지 속이 안 좋아 그런 건지 식욕은 없지만 진한 블랙 커피 한잔이 생각났다. 찝찝한 전기 포트에 물을 붓고 전원을 올려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조금 깨림직한 머그잔을 살짝 세척하고 커피분말을 붓고 물을 따랐다.


빈 속에 뜨거운 커피가 흘러 들어간다. 내 집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침대 위에서 커피 마시기를 해본다. 한 모금 넘기고 배 위에 컵을 올려 놓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리 저리 컵을 옮겨갔더니 배에 뜸을 뜨는 기분이 들고 몸이 약간 풀리고 나른해 진다. 빈 속에 들어간 커피가 뱃속을 씻어 주는 느낌도 들며 속이 개운해 진다. 어지간한 약보다 낫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한숨 나른하게 낮잠을 잤다. 오후가 되니 역시나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적도의 나라는 비도 폭우처럼 온다던데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장맛비처럼 온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다. 자카르타가 멋진 선물을 준다. 평화롭고 안락하고 풍성하다. 그런데 ‘어맛?’ 창틀 바닥으로 물이 새어 들어온다. ‘아하하핫!’ 나는 웃음이 났다. 크게 웃었다. 창틀 사이로 비가 새어 들어오다니 귀엽다. 많은 양은 아니다. 나는 수건으로 덮어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낼 거라고 생각했던 한 때가 이래저래 풍성한 일들로 가득 찼다. 자카르타에 오길 잘했다.


화장실을 5번 정도 다녀온 것 같다. 기운이 없다. 어디 괴롭게 아프지는 않아서 그나마 살만하다. 그냥 몸이 물 잔뜩 먹은 솜 덩어리마냥 무겁게 축축 늘어지는 게 불편한 정도...이런 와중에 그래도 이렇게 내일 아침까지 지내기는 아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기어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자 마음 먹었다. 걷기도 싫으니 그랩 택시를 잡아 타고 자카르타에서 그래도 인지도 있는 쇼핑몰로 가서 저녁 먹고 딱 들어오는 걸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그랩 택시를 불렀다.

비 내리는 어두운 낯선 도시를 택시를 타고 가는 기분이 신선했다. 잠깐 창을 열어 바람을 맞아 봤다.

쇼핑몰엔 사람들이 엄청나게 정말 구름 떼처럼 모여 있어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 걸어왔다. 새해 맞이 행사가 있나 보다. 10시까지 영업하는 쇼핑몰에 9시 반이 다 되어서 도착했으니 대부분 매장이 마감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당연했다. 돌아다니다 결국 버블 티 한 잔과 조각 케익 하나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조각 케익과 버블 티 한잔으로 새해를 고요히 맞이 하는 것도 단아하고 좋다! 캬하핫'

11시가 넘은 시각...새해가 시작할 때 까지 기다려 볼까 했지만 말 그대로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 붙을 것 같아서 정신 줄 내려 놓고 물고 빨았다.

창 밖을 보고 있자니 멀리서 하나 둘씩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새해 맞이를 폭죽 놀이로 하나 보다. '우와~ 창이 큰 방을 잡았더니 이런 재미가...' 휘황찬란하지 않은 아주 소박한 폭죽이라 더욱 보기 좋았다. 집집마다 여기 저기서 조그맣고 동그랗게 폭폭 올라왔다. 가까이에서 멀리서...하나 둘 폭죽이 늘어가다 음악이 전개 되 듯 점점 빛이 많아지고 높이도 높아지며 볼륨도 커져갔다. 폭죽의 소리도 클라이막스를 향해 갔다. 새해가 임박했음을 빛과 소리로 예감할 수 있었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 달달한 버블 티와 케익, 조그마한 소동을 일으키는 불꽃들과 소리와 함께 자카르타의 어느 호텔 방에서 혼자 한 해를 맞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