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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영 Aug 01. 2024

자유:삶의 목표와 의미를 위한
적절한 균형

자신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나에게 자유를 허락해 준 곳

 

모든 것에는 정해진 게 없다고 생각된다. 

사회적으로 규범 된 어느 정도의 틀은 필요하지만 도덕적·윤리적으로 어긋나지만 않으면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단어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듯이, 단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그 의미가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생각해 보면 ‘자유’라는 단어가 정말 흥미롭게 생각된다. 

이 단어는 한 단어에 여러 뜻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어떤 말을 의미하는지 모든 사람이 그 뜻을 알지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제일 많이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도 타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며, 서로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딱히 얘기해 보지 않는 주제이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된 근로소득을 받으며 한 번씩 지칠 때마다 ‘아 자유로워지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 말의 뜻에도 여러 결말이 있다. 반복된 지친 일상 속에 휴식을 느끼고 싶고, 또 누군가는 확고한 계획 없이 벗어나 어디선가 불확실한 무언가에서 경제적인 자유를 얻고 싶다거나. 많은 예시를 들 수 있지만,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도 많기 때문에 나 또한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할 자격도 없다.

 

 사람은 시간이 정해져 있고, 주어진 시간을 다 사용하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게 우주일 수도, 천국이던 본인이 원하는 곳이던, 그냥 어제 먹고 싼 똥처럼 물 내리면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눈앞에 보여주며,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없으니 각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거다.

그것 또한 개인의 ‘자유’다. 생각이 이해되면 공감이 되는 거고,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다면 그냥 존중하면 된다. 둘 중 하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본인의 자유도 존중받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준에서 너무 벗어난다면, 그냥 신경 쓰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시기별로 생각이 너무 많이 달라지긴 하지만,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는 나도 타인을 존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면, 왜 저렇게밖에 생각을 못 할까 답답함을 느끼고, 자유에 대한 기준을 좀 바꿔보라며 타인의 자유에 대한 기준에 간섭해 보기도 했다.

개선의 의지가 보이지 않으면, 존중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이러한 부분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했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내가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제시해 보려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내 자유를 잠시 찾았던 순간들이 어쩌면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해 줬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의 자유에 대한 기준이 어떤 식이든 상관없었다. 만날 사람과 할 일은 많았고,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으면 이 사람이 자유를 어떤 식으로 찾아도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난 그 사람들과 지금 순간에 필요한 얘기들만 나누면 되었고, 이 방식이 잘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얘기를 나누다 어떤 얘기를 해도 크게 관심이 없던 무관심에서 차차 여러 얘기를 들어보고, 흥미롭게 생각한 것들은 궁금해해 보기도 했다. 관심 없거나 내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세상에 저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끝나는 존중해 주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가장 관심이 갔던 유형은,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정말 본인의 ‘자유'를 찾았고, 부족함과 필요 이상의 것을 전혀 고민하지 않는 듯한 태도가 보였다.

유명한 대학병원의 의사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저 좀 더 나의 자유를 찾고 싶다는 이유였다. 재밌는 일도 많고 평화로운 곳에서 지내는 게 자신이 생각한 기준이라는 이유로, 시골 한적한 곳으로 들어와 소박한 일을 하며 낭만을 찾아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과 사업을 통해 삶의 안정적인 균형을 맞춘 사람은, 앞선 사람과 반대로 사회적인 것에 회의감을 느껴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삶에 자유에 대한 기준을 깨닫고 싶어 해외 곳곳을 떠돌며 궁금증을 해결하고 돌아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본인만의 행복을 위해 지내고 있었다. 

이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해방감'이었다. 물질적, 정신적, 감정적으로도 후회가 없고 부족함과 그 이상을 원하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서 느낀 것이, "과연 내가 누군가의 자유에 간섭해도 될까, 내가 무언가를 제안해 볼 기준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느꼈다.

이들처럼 무조건 사회적인 것에서 해방을 느끼고 떨쳐버리라는 것이 아니지만, 본인이 생각한 기준에서 더 좋은 게 있고 새로운 것을 그 사람에게 제안해 보려 할 때, 그 대상이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었다.

소박하고 사소한 거라고 해도 물질적인 걸 더 제안해 볼 수 있고, 정신적으로 더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본인 기준에서 느꼈더라도, 그 상대가 이미 행복하고 자유를 느낀 상태라면? 나를 불편하게 느꼈을 수도 있고, 이미 자유를 느낀 사람에게 내 말을 끝까지 책임질 수도 없고, 결과가 좋지 않거나 어떤 새로운 결말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게 내가 굳이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이유이다. 부족함이 보이는 사람에게 더 나은 기준을 잡아줄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사소한 일로도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해 챙기기 바빴고, 무언가 얽히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었고, 불편하다는 의사를 전했던 사람도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만 생각한 이기적인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자유는 행복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 직결된다고 생각하는데,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만의 온전한 자유를 찾고 행하고 있는 중이 아니니,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행복했던 사람들은 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자유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행복에 집착했었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 헤집고 나오려 할 때마다 심리적 자유와 평온을 느끼려고 했고, 그걸 당장 행복할 수 있는 일들로 덮어버렸다. 

나만의 자유를 찾은 것 같았고, 그 방법이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덕분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행복했던 기억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버렸고, 옛날 과거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장 지금 행복해야 내가 자유로운 거야"라고 기준을 세웠을 때 모든 기억들을 다 잃었다고 느꼈고, 그때부터 행복한 순간들을 담아보려 하고 많이 기억해보려 했다.

남들이 관심 가지고 섣불리 시도하지 못할 일들과 장소들을 가며 안식처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계속 지속되다 보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경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두 단어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기억 속에는 대상이나 사물과 장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교류와 교감을 통해 좋은 일, 가끔 불편한 일도 생기며 두고두고 회자하며 같은 상황이 올 때 그 기억을 통해 추억을 하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는데, 내 경험 속에는 특정 행위와 장소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으로 교류만 있었다. 내 애착 그뿐이었고, 거기에 특정 인물이 함께한다면 결말의 별다른 복선이 없는 그냥 재미있고 행복한 한 편의 단편영화 추억 하나 더 만들기 정도였다. 후회는 하지 않고 이게 나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이런 경험 속에서 방법을 찾아 사회적으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방법과 대안을 갖춘 사람도 많고, 이것 또한 본인이 계속 행복하다고 느끼면, 이게 그 사람의 자유인 것이다.

이런 말들도 많이 듣는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들은 주변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단언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나에게 맞는 적절한 균형을 찾아보고 싶었고, 그 방법을 다시 찾아보고자 고민하며 다시 시작해 보려 하니까. 적절한 균형을 찾아보지도 않고 지금 쫓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기억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퇴근하고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으면 바로 끝 아닌가? 남는 게 있는가?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것을 포함해 복합적으로 본인만의 본질과 자유를 찾아야 모든 게 끝나는 순간이 와도 의미가 남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본인 자유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면?

본인만의 적절한 균형을 찾은 사람들은 행복하겠지만, 당장 모두가 그럴 수 없듯이, 책상 앞에만 앉아 균형에 쫓겨 살다 순리대로 늙고 새로운 경험에 겁내는 시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삶의 방법일 수 있다. 이것 또한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만 종이에 적어봐도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고 해보지 못한 경험이 더 많고, 보이지 않는 것들 또한 아직 느끼지 못한 게 많다. 결국 과정과 순서가 지금 내가 남들과 다를 뿐, 나중에는 모두가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적당한 목표와 살아갈 의미들을 챙기고 싶고,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가 정리하고 싶던 기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야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순간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기억'이고, 그 순간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경험'이라고 본다. 마치 나 자신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진정한 편안함을 느꼈던 때는 자유롭게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생각을 비워내고 '자유'를 만끽했을 때였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시기에 가장 편안함을 느끼며 찾은 '자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나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줬던 ‘자유’가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나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말해줄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행했던 내 자유에서 의문점이 들었고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 자신과 타인을 대할 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한 태도로부터 묻어두고 지낸 불편한 감정들을 다시 꺼내 보아야 하고, 여러모로 후회도 해보며 나를 새롭게 대하고 이해하기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내 자유에 대한 기준을 다시 찾을 때까지 내 여행은 계속된다.


갯바위 위에서 낚시하며 먹는 막걸리 한 잔은, 한강뷰 위스키 바 부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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