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목장이야기 Ep1

by 목장가족




“가! 가!!”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우렁찬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깜짝 놀란 나는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익숙한 자세로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남편이 보인다. ‘뭐야. 꿈에서도 소를 모는 거야?’ 일어나 시계를 본다. 새벽 3시 50분. 10분 뒤면 우리의 출근 시간이다. 우리가 출근할 곳은 집 뒷문에서 1분 거리, 목장이다. 새벽 4시 정각. 우리는 서둘러 작업복을 입고 나가 어두운 축사에 불을 밝힌다.




4시에 생체 알람이 맞춰진 건 인간만이 아니다. 젖소도 4시가 되면 귀신같이 일어나 하나둘 대기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20여 년간의 세월을 자랑하는 우리의 낡은 착유실로, 젖소들이 줄을 서 입장한다. 착유실 안 여덟 개의 칸은 어느새 젖소들로 가득 차 북적인다.


착유실에서 하는 일은 간단하다. 1. 사료를 준다. 2. 젖소 젖꼭지를 닦는다. 3. 젖꼭지에 착유기를 채운다. 4. 다 짜면 젖꼭지에 소독약을 묻혀 보낸다.


계속되는 젖이라는 글자에 젖슈탈트, 아니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올 것 같지만, 정말 착유실에서만큼은 젖소의 젖꼭지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다. “아얏!” 나는 열정적으로 젖꼭지를 닦다 젖소 꼬리에 눈 싸대기를 맞는다. 꼬리털이 싸리비처럼 억세 꽤 아프다. 젖소 꼬리에 덕지덕지 굳은 똥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아오.” 아픔보다 더한 ‘기분 나쁨’이 나를 강타한다. 나는 손가락으로 “너어!” 하며 애꿎은 젖소를 째려본다. “으악!” 내 눈빛에 괄약근까지 놀란 젖소는 핵폭탄 급 설사를 내 얼굴에 정밀 타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휴, 젖소와의 기싸움에서 덤벼봤자 항상 패배하는 건 내 쪽이다.




이렇게 젖소와의 사투를 벌이는 착유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착유는 젖소의 젖이 차오르는 12시간의 텀을 두어 하루 두 번, 새벽 4시, 오후 4시에 행해진다. 3시도, 5시도 아닌 4시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한 최소한의 타협점이다. 이른 퇴근을 위해 착유를 한 시간 당기면, 새벽 3시에 “저 아직 잠 안 잤는데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고, 1시간 늦잠 자겠다고 5시로 미루면, 저녁 9시에 야식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해야 한다. 나름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목장의 착유 시간은 4시로 고정되었고, 우리는 새벽이든 저녁이든 4시만 되면 축사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낙농인의 시간은 일반 직장인들의 시계(9to6)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남들이 출근 준비하는 7시에 우린 새벽 노동 후 다시 잠자리로 향하고, 한창 회식하며 파티를 벌일 시간에 우린 쥐 죽은 듯 잠을 자야 한다. 직장인이었던 우리가 낙농을 시작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단연 ‘시차 적응’이었다. 4시는 말이 좋아 새벽이지, 사실상 동이 트려면 한참 먼, 어두컴컴한 한밤중에 가깝다. 초반의 우리는 4시 기상으로 하루 종일 해롱거리다, 낮잠을 두어 시간 시원하게 때려주고, 또 막상 밤엔 잠이 안 와 11시에 잠들곤 했다. 그러면 다음 날 새벽에 후회하고, 또 피곤하다고 낮잠을 자버리고, 또 밤에 잠이 안 와 늦게 자고, 다시 후회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됐다. “나 오늘 끝까지 버틴다. 낮잠 절대 안 자!” 우리는 굳은 결심으로 눈꺼풀과 씨름을 이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9시 취침 패턴을 지켜가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밤 문화’와는 멀어져 갔다. 우리에게 ‘밤 외출’이란 거의 연중행사와 다름없는 일이다. 어차피 8시만 되어도 사방이 깜깜해지는 시골에선 갈 데도 없지만, 가끔은 애들 재우고 치킨 시켜 먹는 다른 부부들이 부럽기도 하다. 배달도 안 되는 깡촌에 사는 것도 서러운데 밤늦게까지 TV도 못 보다니! 심지어 우린 낙농 생활을 시작한 후,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한 번 하지도 못했다. 연말연시에도 소 젖은 짜줘야 하고, 12시면 한창 딥 슬립에 빠져있을 시간이므로. 이쯤 되면 낙농인에게 ‘밤’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다.



이런 생활 패턴 때문에 젖소 키우는 사람들은 사회생활 한 번 하기도 쉽지 않다. 간혹 갖는 지역 낙농 2세 모임은 대부분 점심이나 함께 하는 정도고, 이마저도 오후 착유 시간에 쫓겨 다들 급히 밥만 먹고 집에 가기 바쁘다. 친목 한 번 다져보겠다고 큰마음 먹고 펜션에 방을 잡으면, 새벽 3시에 “착유 잘하고 오쇼잉” 하며 헤어졌다가, 다들 각자 축사에서 일하고 다시 집합하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물론 목장 스케줄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낙농에도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으니 그건 바로, 크게 바쁜 일이 없다면 대략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자유 시간이라는 것이다. 직장인 시절, 회사 창문 너머로 한가로이 밖을 거니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우리는 평일 낮에도 한가로이 데이트를 할 수 있다! 물론 데이트 장소는 서촌의 예쁜 브런치 카페가 아닌 사료 회사 옆 짜장면 집이지만.



또, 낮에 자유롭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겐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연차 쓸 걱정 없이 유치원 행사에 참석할 수 있고, 아이가 아플 때 허둥대지 않고 부모가 같이 병원에 데려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주말에만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맞벌이 부부와 달리 매일 여유롭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세상 어떤 인생도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건 없는 듯 하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관계를 포기한 만큼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게 됐고, 도시의 화려한 밤 대신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얻었다.


도시처럼 휘황찬란한 야경이 없는 목장의 밤은 칠흑같이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그 어둠 덕분에 밤하늘의 별은 더욱 촘촘하고 선명하게 빛난다. 새벽 착유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새벽 4시, 오늘도 우리는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에 감탄하며 목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