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가족탄생기 Ep6
우리 목장엔 9명의 대식구가 산다. 1세대 시부모님, 2세대 우리 부부와 시누이 부부, 3세대 꼬맹이 셋. 2017년 나의 정착을 시작으로 매년 새로운 식구가 추가됐다. 3년도 채 되지 않아 첫째 출산, 시누이 부부의 귀촌과 출산, 나의 둘째 출산이 이어졌다. 덕분에 소 울음소리만 들리던 조용한 목장은 사람 냄새가 나며 시끌벅적해졌다.
1인 가구가 40%에 육박하고 핵가족이 보편화된 시대에 대가족으로 산다는 건 그 자체로 ‘문화 대충돌’ 같은 일이었다. 우리의 충돌은 주로 ‘다름’에서 시작되었고, ‘다름’의 모습은 가지각색으로도 나타났다.
우리 식구는 E(외향인)과 I(내향인)의 모습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중 나의 시아버지는 외향인 중에서도 특출난 에너지를 자랑하셨다. 낙농, 마을 회의부터 아코디언, 하모니카, 파크골프, 노래 교실까지, 항상 모임을 따라다니시느라 얼굴 뵙기가 힘들었다. 반면 어머님은 집에서 살림하고 텃밭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향인 어머님에게 아버님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느그 아부지가 언제 집구석에 붙어있는 거 봤다냐.” “도대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나 몰러.” 어머님이 귀에 닳도록 하시는 말씀은 과장이 아니었다. 공사가 다망한 아버님의 핸드폰은 항상 분주하게 울려댔고, 일하시다가도 “오메 나가야쓰겄는디.”하고 갑자기 사라져 가족들의 공분을 사기 일쑤였다.
나보다 네 살 위인 시누이, 언니의 성격은 그런 아버님과 많이 닮아있었다. 노는 데에 진심인 언니는 본가로 내려오자마자 9인승 카니발을 뽑았다. 집순이 인 나와 달리 언니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나가자”였다.
“나가자!”
“네? 오늘은 미세먼지가..”
“마스크 끼고 가면 되지!”
“아.. 오늘은 집안일 좀 하려 했는데..”
“내일 해~!”
활달한 외향인의 등장으로, 무기력한 내향인들의 일상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쇼핑몰이나 이색 맛집이 없는 시골에서 놀 거리를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기껏해야 인근 지역축제를 쫓아다니며 관광열차를 타고, 닭꼬치를 사 먹거나, 꽃구경하는 게 다였지만, 이 정도면 무자극 청정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급 문화생활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어디 놀러 갈 때면 항상 차에 구황작물, 과일이 든 양푼을 챙기셨다. 가족 간의 ‘다름’은 외식에 대한 인식에서도 드러났다. 이미 도시 생활을 경험한 자식들에게 외식이란 당연한 문화였지만, 어머님에겐 가장 돈 아까운 게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이었다. 우리의 외식엔 꼭 어머님의 “뭐 먹은 거 같지도 않대. 김치에 밥이나 먹음 쓰겄다.” 같은 볼멘소리가 함께했다.
결국 어머님은 직접 도시락을 싸는 방식을 택하셨다. “대강 싸가믄 되제.” 찰밥, 김, 김치로 시작된 도시락은 점점 진화해 바지락 국물과 낙지에 초장까지 추가되었다. 언니는 “아 뭘 또 싸가. 그냥 사 먹지.” 하면서도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새벽부터 소시지볶음, 계란말이, 제육볶음 등을 만들었다. 그럼 어머님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귀찮담시롱. 걍 사먹지는.”이라고 하셨고, 언니는 “아, 또 돈 아깝다 할 거잖아!”라며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또 외식을 하면 “이게 얼마대? 워매워매 8만원? 미쳤구만!” “아, 그러니까 싸온다 했잖아!”로 이어졌다. 이 레퍼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가족 간의 ‘다름’은 속도에서도 나타났다. 우리 식구들은 유난히 성질이 급했다. 남편과 나는 영화관에 한 번 가면 엘리베이터를 못 기다려 8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TV 하나를 켤 때도 화면 뜨는 그 잠시를 못 참아 껐다, 켰다를 반복해 시간이 더 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시부모님 앞에서 나는 그저 나무늘보에 불과했다. 두 분과 착유실에 한 번 들어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님은 젖소가 나갈 때 1초라도 빨리 보내시겠다고, 열림 버튼을 먼저 누르고 문 열리는 틈새에 잽싸게 젖소 젖꼭지에 소독약을 묻히는 분이셨다. 어머님에겐 젖소 발에 차일 위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속도였다.
아버님은 더 하셨다. 젖소가 착유실에 들어오지 않고 잠시라도 꾸물대면 “얼른 와 이 자식아!” 하며 뛰어, 아니 거의 날아다니셨다. 또 내가 젖꼭지를 닦는데 귓가에 “대강 해브러” 소리가 들려서 보면, 아버님은 이미 내 옆으로 와 착유기를 손에 들고 대기하고 계셨다.
이렇게 다급한 분위기에도 느긋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집안의 사위이자 아이들 고모부였다. 도시 태생의 고모부는 도시 남자답게 차분하고 깔끔했다. 고모부는 장화에 소똥이 묻으면 특유의 여유로운 자태로 ‘쏴아-’ 물을 뿌렸고, 아버님은 “어차피 더러워진디. 뭐다러 닦는당가. 빨리 소나 모소!”라며 재촉하시곤 했다. 또 한 손으로 젖소 젖꼭지를 짜 보고 있으면, 아버님은 당장 달려와 “한 손 뒀다 뭣한다. 두 손으로 해야제!” 하며 양손으로 젖꼭지를 쫙쫙 짜는 시범을 보이셨다. ‘저렇게까지 빨리해야 할 필요가 있나, 다들 왜 이렇게 급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건 고모부도 마찬가지였다.
대식구가 함께 산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삐져서 묵언수행을 하기도 했다. 심할 날엔 ‘그냥 때려치울까’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직서 한 장이면 관계가 정리되는 회사와 달리, 혼인과 혈연으로 묶인 우리 목장에서 ‘퇴사’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리가 계속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 과정엔 끝없는 이해와 인내, 때론 포기가 수반되었다.
이제 차고에 아버님 차가 없으면 “역시 우리 아버님, 청춘이셔!”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머님이 식당에서 맛없다 염불을 외시면 ‘물은 물이오, 산은 산이오다’ 하고 한 귀로 흘려보내게 되었다. 항상 씻는 시간이 늦어 식사가 다 끝난 뒤에 식탁에 앉는 고모부를 보고, 어머님은 이제 “뭘 그렇게 씻을게 많당가?” 말씀하는 대신 “어서 드소”라며 밥을 내어 주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길들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