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가족탄생기 Ep5
귀촌 1년 차, 느긋하던 시골 일상에 폭풍 같은 하루가 찾아왔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2018년 어느 봄날이었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은 목장에서 일을 하고, 만삭 인 나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대는데 갑자기 배에서 반동이 느껴지며 두둑 소리가 났다. ‘뭐야. 아기 발바닥이 내 배를 가격했나?’ 조금 지나니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곧 깨달았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양수가 터진 것이었구나!
여섯 시 반, 출산 가방을 챙겨 남편과 집에서 나왔다. 산부인과가 전무한 ‘인구 소멸 지역’에 산다는 건, 진통 중에도 30km의 ‘원정’출산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통증을 끙끙 참아가며 목포의 한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굴욕 3종 세트라고 불리는 관장, 제모, 내진을 받았다.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궁문 2cm 열려있네요. 10cm까지 열려야 되니까, 내일 아침 8시 정도에 나올 거예요.”
라는 말만 던지고 사라졌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지금이 7시 반인데, 12시간을 이러고 있으라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데 출산 예정일이 내일인 것치고는 진통이 너무 세게, 너무 자주 왔다. 순간 출산 선배들이 얘기했던 ‘무통 천국’이 생각났다. 나는 마취 선생님이 퇴근하시기 전에 다급하게 외쳤다.
“무통주사!! 얼른요!”
천사처럼 보이는 선생님이 들어와 내 척추에 주사를 놔주셨다. 새우처럼 허리를 굽혀 힘겹게 주사를 맞았는데도, 무통 천국은커녕 더 강렬한 통증 지옥이 시작됐다. 나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계속 “얼마 열렸어요?”를 외쳐댔다. 4cm. 6cm. 자궁문 열리는데 가속이 붙었다.
맘 카페에서 출산의 고통을 검색했을 때 ‘트럭이 배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 ‘칼로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라고 비유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그건 너무 막연한 표현이었다. 전혀 실감 나지도, 와닿지도 않았다. 내가 직접 겪어 본 ‘진’진통은 ‘고속버스 위에서 급똥을 참는 고통. 그런데 그것의 100배!’였다. 31년 인생의 급똥을 전부 소환해도, 진진통 한 번에 비할 수 없었다. 진통이 너무 거센 나머지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이러다 죽을 것 같은데. 나는 다시 간호사를 붙잡고 자궁의 안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8cm..! 이제 고지까지 20프로 남았구나! 그나마 빠른 속도에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산부인과 선생님이 단숨에 내 기대를 짓밟아버렸다. 선생님은 체구가 작은 나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흠.. 힘들 것 같은데. 못할 것 같은데.”
환청인가?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선생님? 안될 것 같음 얼른 제왕이라도 해주시라고요! 나는 진심으로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갑자기 분만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한 간호사가 내 무릎을 세워 자세를 잡아주며, 힘을 줘보라고 했다. 네? 갑자기요? 나는 얼른 정신 줄을 부여잡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읍! 하.. 못 하겠어요.”
“할 수 있어요! 다시 힘줘 봐요!”
“읍..! 안 돼요! 어떻게 줘요?”
“똥 싸듯이요!”
똥을 어떻게 쌌더라.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는 힘주는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푸우우우” 내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소리가 나왔다.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실핏줄까지 다 터져 좀비의 몰골이 된 나는 뒷걸음질 칠 힘도 없었다. 선생님은 위에서 배를 밀어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해보자 격려하셨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힘을 줘야 끝난다, 이 고통을 끝내려면 힘을 줄 수밖에 없다! “으으읍!!” 나는 3kg 짜리 똥을 싼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부었다.
“머리 나와요!” 소리가 들리더니 물컹한 무언가가 시원하게 빠져나오는 느낌이 났다. 동시에 지옥 같던 통증도 썰물처럼 쑥 사라졌다. 휴, 끝났다. 해냈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9분이었다. 나를 닮아 성격이 급한 아기는 병원에 온 지 3시간도 안 돼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간호사분께서 작은 핏덩이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나의 딸은 “애앵” 우는소리와 함께 세상 속 첫 숨을 내쉬었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경이와 감동의 순간이었다.
나는 며칠 뒤, 시골 모텔방을 연상시키는 목포의 한 조리원으로 옮겨졌다.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를 보며 ‘이제 고통도 끝이구나’ 하고 안도했다. 그런데, 착각도 잠시였다. 곧 강력한 젖몸살이 찾아왔다. 가슴이 돌처럼 딱딱 해져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수유실에서 만난 조리원 선생님은 내 통증보단 아기에게 줄 초유가 더 우선인 듯했다. 친히 수유 자세를 잡아주며, 다정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한 번 물려보세요. 할 수 있어요.”
내 가슴이 공공재처럼 드러났다. 주변을 둘러봤다. 산모들 모두 가슴을 드러내 아기에게 젖을 먹이거나, 유축기로 초유를 짜내고 있었다. 이거 완전 착유실이잖아? 나는 처음으로 젖소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오른쪽 눈에선 고통의 눈물이, 내 왼쪽 눈에선 젖소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빨리 목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집에 오고 나서야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나는 ‘왜 인류가 이런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출산이란 행위를 계속 이어가는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새 생명이 생기고 가족 구성원이 한 명 더 추가된다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아기 하나로 인해 집 안에는 대화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첫 손주를 본 시부모님의 얼굴에서 나는 환희를 보았다. 목장 가족 3세대의 첫 탄생. 그것은 우리에게 환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