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책봉의 마지막 승부수
이제 권력의 중심에 선 두태후와 경제는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차기 권력을 위한 치열한 정치공학적 암투>를 시작하게 된다. 두태후는 황태자 유영과 교동왕 유체가 아니라 경제의 동생인 자신의 작은 아들인 양효왕 유무를 차기 황제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저자는 두태후가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은 황궁의 가족 연회에서 술에 취한 경제가 "짐의 사후에는 제위를 양효왕에게 물려주갰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태후의 조카 두영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 한나라의 황제 계승 원칙입니다. 황상께서 어찌 독단적으로 제위를 양효왕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까?"라는 직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은상(은상 殷商) 시대에는 ‘형종제급(兄綜第及: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자리를 이음)’과 ‘부자상전(父子相傳: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줌)’이 병용되는 이른바 쌍궤제(䉶軌制)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과연 경제는 어떤 뜻으로 연회에서 그런 말을 흘렸으며, 그 배경은 무엇일까? 왕뤼친은 그 정치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첫째는 중국의 황실에서 황제와 태후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기에 우선 태후의 환심을 얻기 위함이며, 둘째 동생 양효왕을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경제는 고도의 정치심리적 전략을 펼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강적인 두 사람을 먼저 착각하게 만든 다음 서서히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하는 것이 중국의 권력가들이 사용하는 심리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왕뤼친의 이런 해석을 읽으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의 전략에 섬찟함을 느끼게 된다. 과연 한국인들은 어떻게 중국이란 초강대국의 주변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존립시킬 수 있었을까?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한 위대한 정신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런 것들은 추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황실의 연회가 열린 그해 봄 오초칠국의 난(유방의 치세 아래에서 봉국이 된 오나라 유씨들이 다른 씨족과 연합해서 세력을 확대하자, 경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오, 초, 조 등의 영토 삭감을 도모했다. 이에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이 일어아자, 경제는 문제가 죽으면서 뒤를 부탁한 주아부(周亞夫)를 태위(太尉)로 임명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주아부는 출정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반란 평정 계획을 경제에게 올렸다. "지금 초국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함부로 정면충돌해서는 안 되니, 차라리 양나라를 그들에게 넘겨주는 척해서 군량미가 오는 길을 끊어야 합니다. 그러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양나라의 위치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 서남에서 시작해서 허난성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오초칠국의 반란군은 서쪽으로 진군할 것이 분명했기에 이런 계획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반란군의 제압뿐만 아니라 당시 양나라의 왕인 양효왕을 장기짝으로 사용한 것이었기에 경제는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양나라 군대는 이 반란에서 수만 명의 병사가 전사하게 된다.
여기서 의아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양효왕은 경제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경제는 태위에게 양나라를 구하도록 조서를 내렸으나 태위는 이 조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기>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태위의 그러한 행위를 경제는 징계하지 않았고, 양나라는 근근이 버티면서 공을 세웠으나 한나라의 중앙정부와 그 공을 분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제의 의도는 이제 동생 양효왕에게 분명히 전달되었다. "짐은 이미 결심을 내렸다. 제위는 역시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원칙이다. 동생은 앞으로 제위를 노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 두태후의 노력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한편 노쇠한 경제는 태후로 책봉되지 않은 율희에게 "너희 모자는 때를 기다려라, 나는 태자를 폐하지도 않고, 곧 그대를 황후로 봉할 것을 고려하고 있노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율희는 경제의 이런 부탁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사기 원문에는 율희가 "분노했다. 대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사가 불손했다"라고 적혀있다. <한무고사>에는 심지어 '율희는 분노했고, 황제에게 늙은 개라고 욕까지 했다'라고 전한다. 이어서 일어난 다음의 상소는 율희와 태자 그리고 그녀의 가문이 몰살당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제 7년(기원전 150년) 외조(外朝: 황제가 수반인 내조, 內朝와 구별되는 조직, 승상을 수반이 되며 군력에 내조에 비해 약함)의 관리인 대행(大行)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율희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니, 이제 율희를 황후로 봉해야 합니다."
경제는 이 상소문을 읽자마자 탁자를 치면서 바로 태자를 폐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다음 조정에 들어와 있는 율희의 친척을 모두 사형시킬 것을 명하였다. 그는 외조의 일개 대신이 이런 상소를 한 것은 분명히 율희와 그의 가문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를 기회로 여긴 두태후는 신속하게 장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여 양효왕의 길을 원천봉쇄했다.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제의 총애를 받던 충신 원앙이 두태후에게 춘추 시대의 송나라 시절에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자, 직계 아들과 삼촌과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이 수대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원앙의 이 말을 듣고 두태후는 바로 멍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출신도 비천하고 학문에도 조예가 없었기에 더 이상 자기 아들에게 황휘를 물려줄 꿈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태자 자리를 둘러싼 예측불가의 마지막 갈등이 시작되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권력 투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