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해석 2

그라마톨로지와 마르크스의 유령들

by 박종규

데리다가 서술한 책의 서언과 본문을 읽어본 독자는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난해함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과연 번역은 도대체 제대로 된 것인지부터 의심하게 될 것이다. 흔히 철학사에서 4대 난독서로 불리는 저서 [헤겔의 정신현상학, 후설의 이념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원전과 번역본을 함께 읽어본 필자도 데리다의 주요 저서는 특히 한국어 번역본은 암호해독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의 문장들과 개념의 미끄러짐에 익숙해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에 익숙해진 문학 독자처럼 결론과 상관없이 그냥 작가의 사유와 함께 흐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크 데리다 역시 왜 그러한 글쓰기를 하는지, 우선 이 장에서는 그의 저서 [그라마톨로지]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사용된 그만의 고유한 서술적 방식의 토대를 이해해 보기로 하자,

데리다의 글쓰기는 근대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성찰]애서 시작하여 모던철학의 명확한 개념 규정으로 시작하고 논리적(형식논리와 변증논리) 서술방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나 이념 체계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다. 데카르트의 학문의 뿌리인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인 이유는 이것이 수학의 공리처럼 자명(self-evident)하기 때문이다. 그 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 그리고 나아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보편적 정초주의(Universal Foundationalism: 모든 지식, 의미, 진리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기초 위에 정초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이런 정초주의의 해체를 선호하는 이유는 보편적 정초주의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형이상학적 폭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제까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를 거쳐 하이데거까지 글쓰기를 통해 내적으로 규정된 명확한 개념으로부터 안정된 의미가 발생하며, 이것이 현존(presence)이라는 구조로 굳어져왔다. 대표적으로 이런 구조를 해체하기 원하는 데리다는 바로 이런 서사를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난해함은 자신이 비판하는 그 철학을 수행하기 위함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적 혹은 문맥적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보다는 지연하고 분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개념들이 바로 로고스중심주의와 차연(différance)이란 단어이다. 데리다가 차연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언어의 의미는 즉각 주어지지 않고, 항상 미뤄지며,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속에서만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학한 예는 아니지만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자면 모든 말의 의미는 대립되는 말이 가지는 의미와의 차이에서 주로 발생한다. 남자의 의미는 여자와의 의미 차이에서, 무한은 유한과 차이에서, 사랑은 증오와 차이에서 추후에(지연되면서) 드러난다.


이렇듯이 데리다의 글은 의도적으로 한 문장이 다음 문장에 의해 수정되고, 한 개념이 다른 개념에 의해 미끄러지며, 독자가 '알겠다'라고 느끼는 순간 다시 흔들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독자는 의미를 소유하지 못한 채 추적만 하게 된다. 만약 그가 철학 특별히 서양철학이란 고유한 학문이 가지는 이성이나 개념이나 논리의 명료성을 해체하는 데만 주력한다면 그에게는 적어도 서구의 철학자란 명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데리다 자신도 자기를 순수 철학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 문학, 정신분석학, 신학에다가 프랑스어 특유의 언어유희마저 글쓰기에 동원한다. 이런 융합적이고 복합적인 사유는 일종의 번역 불가능성을 예고한다. 데리다의 글쓰기는 이런 유형이다. “나는 형이상학을 비판하지만, 형이상학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의미는 없다”가 아니라 “의미는 항상 이미 너무 많다.” 그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를 서재나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치유 소설이나 자기 개발서를 읽듯이 안락한 해석자로 두지 않기를 원한다.


데리다의 주저인 [그라마톨로지]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서구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를 비판한 저서이다. 그는 로고스중심주의가 의미·진리·근거에는 중심(로고스)이 있고, 그 중심은 이성, 신, 본질, 보편적 진리 혹은 의미를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원리라는 형이상학적 전제가 근거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는 이와 반대로 의미의 중심은 없으며, 로고스는 가설, 현존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모든 의미는 매개되어 있으며, 자명한 진리와 같은 직접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하기에 순수한 계시, 순수한 의도, 순수한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체는 파괴가 아니며, 중심을 제거하려는 것도 아니라, 중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후기 저서로 불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그의 의도가 드러날 것이다. [그라마톨로기 (1967)]에서 문제의 중심은 의미/언어/기호의 기초이며 비판 대상은 로고스 중심주의, 현존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의미의 원초적 기초를 부정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개념은 차연(différance), 흔적(trace), 글쓰기 등이며 이를 통해 존재론에 대하여 반-현존적 의미론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의 주제는 역사/정치/정의의 기초로 이동한다. 이 저서에서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자유주의적 종언론과 탈마르크스주의이며 그러기 위해 사용되는 전략적 개념은 유령(specter), 빚(debt), 애도이다. 그는 여기서 역사·정치의 최종적 기초 부정하기 위해 비-동시적 존재론(유령론)을 제시한다.

이 정리가 정확한지 아닌지는 독자들의 시선에 맡긴다. 사실 반정초주의란 부평초처럼 떠도는 개념들의 잔치이며 그 잔치상 속에서 어떤 것이 건져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애당초 비교나 정리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 원효가 불후의 명작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에서 소/대승불교를 회통하여 제시한 진여(眞如: 참된 실상 혹은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는 두 가지 길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원효는 이언진여(離言眞如: 언어를 떠난 진여)에서 '진여는 본래 말해질 수 없으나,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항상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주객 분별 이전의 실상은 어떤 형이상학적 정초가 불가능한 비정초적, 비현존적 실상이며 이를 언어나 사유나 표상으로 포착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말로 표현하는가? 이 문제를 해명한 것이 바로 의언진여(依言眞如: 언어에 의거한 진여)이다. 이는 교설이나 언표 혹은 방편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의 측면을 말함이다. 이는 언어나 책 혹은 개념을 통해 드러난 진여이며 독자의 이해 가능성에 맞춘 방편이며,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가명(假名)·시설(施設)의 차원이다. 말은 진여를 가두지 않지만, 진여를 가리킬 수는 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에게 일단 박수를 보낸다. 사실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도 이 장에 언급된 내용은 읽기 쉬운 글들이 아니다. 필자가 이렇게 집약적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읽기에 너무나 편한 글들과 수 많이 소비되는 일회성 글들에 중독된 많은 독자들 중 일부는 그런 플랫폼의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자기 만의 사유를 진행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을 계승한 방법이기도 하다. 플랫폼 기업은 플랫폼만 제공하고 글을 스크롤하는 횟수로 금액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단지 공모전이나 멤버십이란 이름으로 미끼만 던지고, 다시 많은 데이터들을 회수해서 플랫폼의 가치를 높인다.


이 에세이를 읽고 일부라도 이해한 독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책의 1장인 <마르크스의 명령들>이란 내용의 해석으로 진입할 수 있다. 혹시 바로 이해가 어려우면 빈 시간을 이용하여 10분간 명상을 통하여 과잉된 정보로 피로감을 느낀 우리의 뇌를 안정시킨 다음 다시 읽기 바란다. 다음 장은 [햄릿]의 유령과 [공산당선언]의 유령을 데리다가 어떻게 비교하고 다시 미끄러지는 지를 알아볼 것이다. 함께 미끄럼을 타다가 어지러우면 중단하면 된다. 철학은 비교적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보다 안전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지부식 간에 미디어를 통해 쉽게 세뇌되기 쉬운 절대적이고 교조적인 이념이나 개념들 그리고 그러한 사유들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고 비판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