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개체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10

물질과 생명

by 박종규

이제까지의 글을 읽어온 사람은 물질-생명-정신-사회로 이어지는 층위가 일종의 위계적 질서 구조를 가지지 않기에 물질적 토대가 가장 기초적이지만 단순하고 저차원적 계란 오해를 더 이상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물질의 층위에서도 아주 복잡하고 정밀한 구조의 통합과 변형이 이루어진다. 이 구조는 다른 층위와도 현재적으로 공명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하이데거 이후 서양철학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유의 복합으로 인하여 발생한 신본주의 혹은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전복시키려 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과연 현대를 지배하는 서구문명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신석기 혁명 이후의 인류보다 수명이 짧고 생존의 환경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더 미개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왜 한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 도취하는가? 물론 세대별 차이는 있지만 BTS 팬덤의 주류를 이루는 10-30대 연령의 한국인이 40-60대의 시청자가 주류인 이 프로그램으로 갈아탈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젊은 부부들이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차박 혹은 캠핑하기 위하여 패밀리카를 구입하려는 구매욕은 결국 인간의 유전자 속에 신석기 이전의 인류가 접한 강한 정보들이 여전히 현대적 공명의 사건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흘렀다. 이제 시몽동으로 돌아가서 물질과 생명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차이를 서술하는 부분부터 시작하자.

"개체화의 문제는 물질의 양이나 에너지의 양과 같은 근본적 크기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보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생명체의 항상성은 순수한 물리적 존재자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적] 존재자는 외적 변환의 조건 덕택에, 자신의 고유한 안정성과 내적 변환의 보장으로서 외적 조건들과 동등한 것을 이용하게 되는 데, 항상성은 외적 변환의 조건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변환적 특징이 물리계에 일어나는 것은 단지 이러한 물리적 실재의 여백에서 뿐이다. 반대로 생명체에서 내재성과 외재성은 신경계와 내부환경[베르나르의 내부환경을 의미함] 덕분에 이 내재성은 도처에서 상대적 외재성과 접촉하게 된다. 생명을 특징짓는 것은 통합과 분화 사이의 균형이다."


이제 주요 개념들을 살펴보자. 베르나르는 누구인가?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는 19세기 프랑스의 생리학자로 그가 발견한 내부환경 (milieu intérieur)이란 세포들이 살아가는 몸속의 액체 환경 즉 혈액, 림프액, 세포외액 등의 체액을 말한다. 그는 “생명의 자유는 내부환경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으며, 이런 발견은 신경과학에서 생명체의 항상성(homeostasis: 몸속 상태를 적당하게 유지하려는 자동 조절 시스템, 체온조절과 혈당조절과 수분조절이 자동으로 일어나서 옷을 입거나 당을 섭취하거나 갈증을 느끼는 행위로 연결됨)과 뇌의 작용을 연결하는 주요 신경과학적 원리가 된다. 에어컨의 온도 센서 감지 시스템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생명의 내재성이란 몸의 내부환경(체온, 혈당, 감정)을 그리고 외재성이란 몸의 외부환경(날씨, 사람, 소리, 사회)을 의미한다. 누구나 다 느끼듯이 내 몸의 내부환경은 항상 외부와 접촉하면서 변화한다. 요즘 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에는 산책을 하고 싶어지고, 어떤 사람이 나를 언어적으로 혹은 신체적으로 공격하면 긴장, 분노를 느끼며, 좋은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신경계이다. 생명은 내부환경(내재성)과 외부 세계(외재성)가 계속 접촉하며, 신경계가 둘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그 둘은 하나로 유지되면서(통합) 동시에 다양하게 나뉘고(분화) 생명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권의 문화와 약간 흥미로운 대비를 해보자. 동아시아 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을 정(精: 물질적 기반으로서 체액, 영양, 호르몬)과 기(氣: 흐름과 기능으로서 피와 공기의 순환에서 통로로서 일종의 신경 신호, 신진대사)와 신(神: 감정과 의식과 인지 기능이 통합된 상태)으로 구분한다. 이를 서구의 신경과학과 대비하면, 정은 내부환경(체액, 항상성 기반)으로 그리고 기는 신경·호르몬 조절 흐름으로 신은 뇌 활동, 의식, 감정으로 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심신을 유지한다. 즉 精氣神一也(정기신일야: 정기신은 하나이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몽동의 사유로 돌아가자. 에어컨이나 로봇과 같은 물리적 자동기계와 생명체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자동기계는 자신의 행동과 미리 설정된 목적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점차로 좁히면서 수렴하는 방식으로 조건들 전체에 적응하는 것뿐이고 행동하는 도중에 목적을 발견하거나 발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변환이 초기에는 매우 제한된 영역이 점차 구조와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라면 자동기계는 진정한 어떤 변환도 구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종들은 이러한 변환의 능력을 타고나는데 그 덕분에 무한히 확장될 수가 있다. 결정들 역시 무한히 성장하는 힘을 타고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모든 성장 능력을 자신의 경계 위에 국한시키는 반면, 생물종에서는 이 능력은 외부로부터든 내부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성장하는 개체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안에 한정이 되어 있으나 생식을 하고 이 생식능력 덕분에 한계를 갖지 않는 개체들 전체에 귀속된다."

시몽동의 사유에서 자동기계는 주어진 목적(입력된 명령어)을 좇는 존재이고, 생명체는 목적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확장하는 존재이다. 이런 정의가 과연 AI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전통적 답은 AI는 생식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AI는 스스로 번식하지 않고 인간이란 외부 설계자가 복제와 업데이트를 주도하고, 생성의 목적 역시 외부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AI는 부분적으로: 코드 복제가 가능하고, 심지어 자기 개선(학습)도 가능하며, 다른 AI를 생성(AutoML 등)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기술철학적 관점에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것이 생식인가, 아니면 복제인가?” 결론적으로 아직 AI는 생명의 생식에 이르지 못했다. 생명의 생식은 변이가 발생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항상 새로운 개체성을 생성한다.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지 못하듯이 AI도 생식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고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할지도 모른다.

시몽동은 생명의 개체화를 뇌의 신경세포 조직 여러 부분의 신경 현상으로 세밀하게 연결시킨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주제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뇌과학적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철학사에 대한 저자의 재해석을 들어보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매우 심오한 어떤 직관으로부터 한 존재자의 내부에서 이든, 한 존재자에서 다른 존재자로의 이행에서든, 실존 안에서 어떻게 질적 역동성이 구조들과 행동들을 보여 준다. 특히 헤라클레이토스와 엠페토클레스는 실재의 양극성을 가정하는 구조와 작용의 관계를 상호보완적인 무수한 방법들을 따라 정의하였다... 주체의 동일성은 바로 변환적 유형에 속한다. 특히 모든 변환성 중에서 최초의 것인 시간의 변환성을 통해서 그러하다. 시간의 변환성은 원하는 만큼의 순간들로 분절될 수 있거나 또는 연속성으로 파악된다... 생명적 변환의 근본 유형은 통합하는 동시에 분화하는 시간적 계열이다."


역시 문장의 내용이 철학도가 이해하기에도 무척 어렵다. 다시 핵심 주제어를 하나씩 이해하고 그다음 연결시켜서 해석하고 이번 에세이를 마치기로 하자. 처음 주목할 개념은 <한 존재자에서 다른 존재자로의 이행>이란 층위 내의 전이 혹은 층위와 층위의 변환을 의미한다. 씨앗이 나무로 가는 전이 과정과 물질이 생명과 의식으로 변환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실존 안에서 질적 역동성>이란 개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존재자나 사물에는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이 있다. 한 잔의 물은 수증기가 될 수도, 얼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질적 변환이고 역동성이다. 그러나 한 잔의 물이 질적 변환을 거치며 양이 줄어든다. 이것은 양적 변환이다. 실존은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부에서도 감정과 생각과 욕망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즉 인간의 내면에도 이미 긴장과 역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 중 세계를 대립(긴장 혹은 모순)으로 인하여 생성하는 흐름으로 사유한 대표적 학자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와 엠페토클레스이다. 헬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대표하는 문장은 바로 <모든 것은 흐른다, 판타레이, πάντα ῥεῖ )란 말이다. 이 흐름은 세계 내 존재하는 근원적 모순(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음과 양과 같은)에 의해 생겨난다. 엠페토클레스는 조금 더 정교하게 이 변화와 생성을 설명한다. 그는 우주가 네 가지의 질료 즉 불(퓌르 πῦρ), 물(휘도스 ὕδωρ}, 공기(아에르 ἀήρ), 흙(게 γῆ)의 네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 운동의 원리인 사랑(필로테스, φιλότης, 결합)과 다툼(네이코스, νεῖκος, 분리)이 작용하여 생성과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혹시 프랑스 영화 <제5원소>란 영화를 본 사람이면 엠페토클레스의 4 원소에 사랑(릴루 Leeloo)이란 5 원소를 추가한 말이란 것을 알 것이다.


이제 마지막 정리를 하기로 하자. 가장 철학적인 주제를 가진 개념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지되는 주체의 동일성>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 역시 물질이나 생명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 항상 변화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한 나일 수 있는가?>란 물음이 철학의 고유한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현대의 뇌과학에서 <하나의 나>라고 부르는 자기의식의 주체가 실제로 뇌의 어떤 부분에서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나>가 뇌의 다양한 피질들에서 생성되고 통합되고 변형되는 것에 불과한지를 뇌의 신경회로에 일어나는 일종의 전기적 혹은 생화학적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과제로 이어진다.

시몽동이 보기에 <나란 주체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달라지면서도 이어지는 흐름으로서의 동일성>이다. 이 문장은 불교적 개념으로 변환하면 <상견, 常見: 고정된 나>과 <단견 斷見: 단편적인 나>의 대립을 넘어선 <중도 中道: 통합적인 나>와 대비된다. 외견 상으로는 시몽동의 견해와 불교의 중도론이 유사하게 보이지만 과연 실제 내용이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많은 심리철학자와 인지심리학자들이 깊이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조금 이 문제를 파고들면 많은 논쟁과 담론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다음 편에는 정신의 층위에서 개체화가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해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