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가 다극화되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신흥 국가들이 역동적으로 부상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미국은 최강국, 개발도상국은 후진국'이라는 과거의 이분법적 도식에 갇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프레임이다. 급변하는 글로벌 정세를 면밀히 분석하기보다 과거의 관성에 의존해 주변국을 재단한다. 이는 난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신의 성 하나를 지키는 데 급급하다 사라진 수많은 군소 군주들의 한계와 닮아 있다.
반면,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단순히 땅을 나누는 전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착화된 이강(二强) 구도나 단극 체제가 아닌, 새로운 세력의 축을 만들어내어 힘의 균형을 재편하는 고도의 거시적 통찰이었다. 삼국지의 영웅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편협한 선입견에 갇히지 않았다. 그들은 적군과 아군을 넘어, 대륙 전체의 역학 관계를 끊임없이 재해석하며 자신들만의 '천하'를 설계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다극적 세계관이며,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영웅적 통찰이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느끼는 지점은 한국 특유의 '단계론적 접근'이다. 많은 기업이 좁은 국내 시장에서 먼저 성공한 뒤에야 "해외로 진출한다"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유니콘 기업들은 창업 첫날부터 '전 세계'를 시장으로 정의하는 '글로벌(Global)' 사고방식을 견지한다.
삼국지의 영웅들 역시 그러했다. 유비가 돗자리를 팔며 유랑하던 시절에도, 조조가 작은 관직에서 시작하던 시기에도 그들의 머릿속에 '지역구 패자'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중원 전체를 손에 넣겠다는 거대한 스케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 "잘 되면 나중에"가 아니라, 시작부터 "천하를 무대로" 삼는 그들의 기개는 좁은 로컬 시장의 논리에 매몰된 현대의 창업가들과 젊은이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야망의 본질이다.
야망의 크기는 곧 실패를 견뎌내는 내성의 크기와 비례한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작은 손실에도 인생이 무너진 듯 좌절하지만, 천하를 품은 자는 거듭되는 패배조차 위대한 서사의 한 장면으로 수용한다.
때때로 나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영웅들의 상황을 나에게 투영해본다. 만약 나라면 관도대전 승리 후 원소와 내통하던 아군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불태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유비처럼 공명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죽을 때 내 아들을 전적으로 보살피되, 만약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대신 천하의 주인 자리에 앉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촉의 모든 힘을 한 손에 쥐었음에도 공명처럼 변함없이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삼국지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작아진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강력한 자극제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지리적, 정신적 한계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관성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세계는 이미 다극화된 판도로 변모했고, 기회는 좁은 우물 안이 아닌 광활한 글로벌 무대에 널려 있다.
영웅들이 말을 타고 대륙을 누비며 천하를 호령했듯, 우리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처음부터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자신만의 '천하'를 정의해야 한다. 안정과 효율만을 따지는 계산기 같은 삶을 버리고, 웅장한 야망을 향해 자신을 던질 때 비로소 인간의 그릇은 커진다. 삼국지는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는다.
"당신은 작은 성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천하를 품는 영웅이 될 것인가?"
이제 나는 좁은 현실의 문법을 넘어, 세계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나만의 웅장한 서사를 써 내려갈 준비를 마친다.
ps. 중국과 일본은 각각 삼국지와 대망에서 스스로를 “천하”라고 칭하지만, 조선은 스스로를 “팔도”라고 칭했다. 이것이 나는 안타깝다. 이 말은 세계의 중심으로써 단 한번도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향후에 나를 비롯한 누군가가 힘써 자국을 “천하/세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