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un 07. 2024

뉴욕의 총잡이, 어느 택시기사 이야기

노년의 한 길거리 사업가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다

뉴욕의 명물 노란 택시가 길거리를 뒤덮던 한 때,

미드타운 오피스에서 라과르디아 공항까지 30분 내 도착해야 했다. 급하게 콜택시를 불렀다. 전화하는 족족 배차까지 한 시간 기다려야 한다며 거절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찾은 분이 이 한인 택시 기사님이다.


그는 최신형 은색 렉서스와 함께 등장했다. 희끗한 머리에 연세는 60 중반으로 보였는데, 작지만 다부진 몸에 등을 꼿꼿이 펴고 다니는 분이었다. 악수에 힘이 넘치고 투박한 손이 세월의 무게감을 더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어, 내 뉴욕 생활 1년 동안 공항 오고 가는 길의 동행자가 되었다.


40여 년 전 기사님은 한국의 경찰이었다. 번듯한 공무원 직장에 아름다운 아내까지 남부러울 게 없었는데, 어느 날 미국 병에 걸렸다고 했다. 안동 출신 장손이라 당시 어머니가 ‘니가 가면 제사는 우짜노’하고 바짓가락을 붙잡고 우셨다고. 그렇게 당시 돈 한화 100만 원 남짓 들고 미국땅을 밟았다.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퀸즈 서니사이드의 작은 문구점에서 시작한다. 쥴리아니 전 시장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전, 당시 퀸즈와 브루클린은 대낮에도 크고 작은 범죄가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담시티였다.

기사님과 아내분의 문구점도 예외가 아니었다. 툭하면 유리창 깨고 물건 훔쳐가고, 나중엔 대놓고 동네 청소년들이 밤에 흉기와 함께 찾아가 그날 번 돈을 깡그리 털어가기 일쑤였다고. 이대로 가다간 아내가 다치겠다 싶어, 작은 리볼버 권총을 하나 마련했다.

어느 늦은 저녁, 아내가 가게 셔터를 내리는데 복면강도 2인조가 들이닥쳤다.

한 놈은 손에 총을 들고, 턱짓으로 아내를 계산대로 몰아넣었다. 기사님은 창고에서 물건 정리 후 걸어 나오다, 구석의 볼록거울에 비친 겁에 질린 아내를 보았다. 그는 곧 권총을 꺼내 들고 조용히 장전했다. 경찰시절 수없이 사격 연습했던 리볼버가 그리도 낯설게 느껴졌다고 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볼버를 꽉 쥐고, 살그머니 강도들 옆으로 접근해 거울의 아내에게 조용히 수신호를 내렸다. 그에겐 그 찰나의 순간이 일 년 같았다. 아내가 피하지 못한다면 더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잽싸게 두 강도놈 옆으로 접근해 총을 격발했다. 총알은 아내를 위협하던 강도를 직격했고, 다른 한 놈은 깜짝 놀라 총을 네댓 발 난사하더니 뇌전 맞은 생쥐처럼 줄행랑쳤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아내는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한 숨에 달려가 다친 곳은 없는지 후들대는 손으로 몸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멀쩡했고, 두 부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총 맞은 한 놈은 몇 발짝 못 가 사망하고, 다른 하나는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망한 강도는 알고 보니 가끔 필기류 사러 오던 낯이 익은 동네 흑인 청년이었다. 그는 정당방위로 불기소처분이 되었으나, 내 이웃 아이가 날 강도짓하다 그 과정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독한 술로 몇 날 밤을 지새웠다.


그 사건 이후, 코리안 카우보이가 있다는 소문이 주변 동네에 쫙 펴졌다. 이제 문구점 털려면 목숨 걸어야 하니 도둑/강도들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당시 기사님은 ‘삶과 죽음이 한 끝 차이구나’라는 생각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흑인이건, 히스패닉이건, 아시안이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선행이 쌓이자 도둑질 일삼던 동네 비행청소년들이 자신을 삼촌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며 가게는 매우 번성했다.


처음에는 옆 가게까지 확장했다가, 어느덧 건물 전체를 쓰게 됐다. 더 이상 문구점만 하지 않고 델리(간이뷔페/분식점), 야채점까지 하는 거대한 한인 슈퍼마켓이 되었다. 사람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주변에서는 그를 ‘사장님’, ‘대표님’이라고 불렀고 아내는 더 이상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가게 청소와 캐셔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롱아일랜드와 뉴저지 팰리세이드 파크에 넓은 정원 딸린 하우스를 구매했고, 사랑스러운 아이 둘이 태어났다. 이 모든 게 기적 같았고, 매일 소망하던 아메리칸드림이 내 손아귀에 있다 생각했다.

욕심이 생겼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며,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기사님은 퀸즈 플러싱에 2호점을 내는데 그치지 않고, 은행 대출을 최대로 받아 맨해튼 미드타운에 작은 빌딩을 구매하고 그 건물 1층에 3호점을 냈다. 오픈 당일, 그는 창고에 혼자 앉아 그간 참았던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3호점은 그 자체로도 상징적이었으며, 결과 또한 성공적이었다. 한국인의 타고난 근면성 때문이었을까, 맨해튼 3호점은 주변 상권의 고객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침 아이들이 기숙학교에 들어갔고, 수완 좋은 아내가 본점 관리를 맡아주기로 했다. 사업은 이제 활주로에서 이륙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어느 날, 유대계 정복에 검정 챙 모자를 갖춘 하레디 두 명이 3호점을 방문했다. 사장님을 뵙고 싶다고 명함을 두고 갔다. 만나자마자 밸류에이션의 2배까지 두둑이 쳐준다는 말과 함께, 그들은 건물과 가게를 좋은 가격에 인계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단기간에 잘 나가는 3호점이 기득권인 유대계 자본의 신경을 건드렸던 셈이다.


두 눈을 바라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에게 3호점은 뉴욕 한인상권의 아메리칸드림 그 자체였다. 어깨에 걸린 동포의 희망과 기대치는 가볍지 아니했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설명을 하고 돌려보냈다. 두 하레디는 지금 팔지 않은 게 후회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며칠 뒤 겨우 한 블록 거리에 새로운 야채점이 영업을 개시했고 연이어 두어 개의 델리가 가시거리에 오픈했다. 경쟁 가게들의 판매가는 3호점의 60-70%에 맞춰져 있었다. 3호점의 가격을 내리면, 그 경쟁 가게들은 내린 가격의 2-30%를 더 내렸다. 한 달이 지나 영업 이익이 반토막이 났고, 그다음 달은 마이너스를 찍었다.


오기가 생겼다. 퀸즈 2호점과 서니사이드 1호점의 영업이익을 3호점 운영 방어에 들어붇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여간 출혈전쟁을 치르니 도저히 3개 점포를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엔 롱아일랜드 집을 팔고, 두 번째는 2호점을 팔았다. 1년이 가까워질 무렵 은행은 대출이자를 올렸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맨해튼 3호점과 건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남은 건,
공중 분해된 집, 두 점포와 맨해튼의 건물, 그리고 악화된 건강과 술버릇이었다.

다른 사업도 시작해 봤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무너졌다. 행운은 더 이상 그의 편이 아니었다. 월마트 같은 대형 슈퍼마켓 및 편의점 체인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90년대에 서니사이드 본점은 다시 작은 동네 가게가 되어 있었다.


장성한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까지 마쳤다. 그는, 필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불과 몇 년 전, 서니사이드 본점을 정리했다. 문득 아름답던 아내를 돌아보니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미소 짓고 있었다고 했다. 동고동락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젠 둘이 오순도순 여행 다니며 여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했다.


내가 기사님께 넌지시 여쭸다.

"아내분이 좋으시겠어요. 사이좋게 여행도 다니시고, 남편분이 이런 좋은 차로 모시고 다닐테니."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의 미소가 처량하니 슬펐다.

"곧 우리 집사람 먼 길 떠난 지 1년이네.

자식들 다 키웠으니 이제 둘이 화목하게 삽시다, 이렇게 약지 걸고 약속했는데 말이야.

암이었어. 임자 혼자 그렇게 허무하게, 야속하게 떠날 수 있나. 멍하니 혼자 집에 있으면 미칠 거 같았어.

후회스럽고, 죄스럽고, 미안하고.

이 차는 아들이 사 준거야. 이렇게 택시로 소일거리 하고, 사람 만나면서 조금씩 잊고 살라고.

근데 잊을 수 있냐 말이야. 어떻게 임자를, 어떻게 잊냐 말이야."

그러며 옅게 김광석의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흥얼거렸다. 10년이 지난 요즘도 이 노래 들으면 울컥 눈물이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