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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r 18. 2024

조울증 7년 차 (13)

내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

병가에 들어가고 3개월쯤 지났을 때 조금씩 움직일 기운이 생겼다. 집안일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가끔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에 돌이 얹혀있는 듯한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해 가던 어느 날, 남자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다이어트 얘기가 나왔다.


"나 다이어트나 해볼까?" 


큰 의미 없이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예전에 비해 살이 좀 찌긴 했지만 내 외모에 그럭저럭 만족했기 때문에 크게 필요성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내심 남자친구가 지금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길 바라기도 했다. 남자친구의 대답은 참혹했다.


"너는 절대 못 뺄걸?"


너무 의외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자극을 받은 나는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남자친구에게 선언했고, 남자친구는 절대 못할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우리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3개월 동안 목표체중에 달성한다면 남자친구가 나에게 100만 원을 주고, 실패한다면 내가 100만 원을 주는 빅매치가 성사되었다. 


다음날부터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지만 정신력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 공복에 동네를 1시간 30분씩 빠르게 걸었다. 집 근처에 산책로가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산책을 마치면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식단으로 오트밀과 오이,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면 유튜브 영상을 보며 30분씩 홈트레이닝을 했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넷플릭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했고, 점심은 일반식을 먹었다. 일반식이지만 밥(혹은 면)은 평소에 비해 2/3 정도만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무조건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또 1시간 30분씩 산책을 나갔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그런지 우울한 감정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조금씩 체중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더욱 열의가 불타올랐다. 오로지 목표체중을 달성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기를 떠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순조롭게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친구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친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문득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6 평남짓 되는 원룸에서 둘이 함께 지냈다. 서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함께였다. 처음엔 정말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거는 나에 로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한 점이 많아졌다. 서로 수면시간도 맞지 않았고 사실 조금 권태로웠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자고 있는 남자친구를 깨워서 말했다.


"나 이제 집에서 혼자 있고 싶어."


남자친구는 화가 났는지 아무 말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당장 말고 날을 정해서 움직이자고 얘기했지만 그는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운하고 불안했다.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다. 말리는 나를 두고 남자친구는 짐을 싣고 떠났다. 그렇게 1년 4개월간의 동거가 끝나게 되었다.


처음엔 허전했다. 고작 6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이지만 공허함이 느껴졌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남자친구의 짐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헤어진 것도 아닌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잘못한 건가?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 말했어야 했나? 상처받은 건 아닌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당분간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며칠간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뒤 우리는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1년 6개월의 연애는 막을 내렸다. (그 당시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들으며 펑펑 울기도 했다.)


이별 후 다이어트는 성공적으로 마쳤고 목표체중을 만들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에 내기의 상금은 받을 수 없었다.) 학수고대했던 가슴성형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까지 내가 원하던 모습이 되었다. 살이 빠지고 예쁜 옷을 맘껏 입으며 자신감도 차올랐다. 지인들은 어떻게 살을 뺐냐며 비결을 물어보기도 했다. 남자친구의 빈자리는 점점 다른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없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술집에 가면 헌팅이 들어오고 길가에서 번호도 따였다. 클럽에 가면 여기저기서 나를 찾았다.


회사에 무사히 복귀했고 직원들 모두가 나를 반겼다. 완벽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팀장은 이전에 하던 업무 외에 다른 업무들도 맡겼다. 배정된 업무를 기대 이상으로 수행했고, 팀장은 내게 진급을 권유했다. 연봉협상과 승진을 기다리며 이제 꽃길만 걸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자면 이때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우울증에서 벗어나 행복했던 순간은 4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역대 최악의 조증이 재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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