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
"누, 누구세요?"
라고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사람들은 도대체 이곳에 있기는 하냐는 말이다. 노르웨이에 와서 이렇게 숲에서 길을 잃게 되다니. 일주일 내내 비가 왔어서 그런지 온통 미끌거린다. 돌들에 낀 이끼와 떨어진 낙엽들도 물기 때문인지 반짝거린다. 가을이 채 지나지 않았기에 각종 버섯들이 여기저기 뭉개져 있다.
인기척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다시 사라졌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저녁 일곱 시 안개도 끼고 날이 제법 어두워져 앞 길이 희미해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헤드라이트를 켰다. 희미하지만 들려오는 물소리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는 뒤늦게 익은 블루베리 부쉬에 서 있었다. 한참을 앉아서 익어 터진 블루베를 따 먹고는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익을 때로 익어서 터진 블루베리가 손과 입에 여기저기 퍼렇게 자국이 남겼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웠다.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긴장했더니 물이 간절했다.
'부스럭'
이번에는 분명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이다.
헤드라이트로 뒤돌아보자 큰 개만 한 크기의 하얗고 검은색 줄무늬의 동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스컹크인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스컹크라고 단정 지었다. 방귀 냄새라도 기대해야 하는 건가. 나에게 다가오려나.
곧 나를 노려보던 스컹크라고 생각한 동물은 뒤로 몸을 돌리더니 모른 채 열심히 땅을 판다. 그 옆에 자세히 보니 같은 종족의 무리들이 몇 더 있었다. 가족인 것 같았다. 늑대나 순록이 아닌 것에 안도감이 들어앉아서 물 마시던 발걸음을 재빠르게 옮겼다. 아무리 휴대폰을 들여다봐도 수신이 터지지 않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이킹 투르(Tur) 앱이 나의 이동 경로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나는 분명 호숫가 근처에서 헤매고 있고 나의 목적지라고 여겨야 할 히테(Hytte)가 근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텐트를 치기 싫어 히테를 가려고 예약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돌길 트랙을 따라갔어야 했다. 가라는 대로 갔어야 했다.
깊은 산속에서도 혼자라니 중얼거렸다. 혼자 지내온 시간들이 벌써 몇 년째란 말인가. 마흔이 훌쩍 지나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였는데 혼자 먹고 자고 등산가고 하는 것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음을 내 몸과 마음이 말해 주고 있다. 나는 분명 사람들과 말하기를 좋아하고 여행 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왜 혼자가 되었을까. 오랫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뒤늦게 합류한 영국인 노라 와는 더 이상 일하기가 싫었다. 그녀와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잘난척하는 그 모습도 더 이상은 보기 싫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했으며 쌓아왔던 내 14년 경력을 두고 직장을 떠나버렸다. 그 뒤로 나는 프리랜서라는 명목 하에 직장인이지만 아닌 그런 나로 살고 있다. 가끔 시간제 일을 하기도 하고 있지만, 소속되어 있지 않는다는 기분을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지 외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온전히 나로 살기 연습을 하는 중이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지도 17년 그리고 혼자가 된 이후로 나는 숲으로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헬스장에서 매일 하는 운동과는 다르게 숲을 걸을 때면 강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날씨가 좋으면 등산을 가는데, 그때마다 들리는 바람소리, 나뭇잎 소리, 새소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이 나를 나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그런데 오늘은 길을 잃어 몇 시간째 걷고 있다.
'타탁'
낙엽 밟는 소리다. 누구지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동물이려나.
'타탁 타탁'
헤드라이트가 깜빡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임시등을 찾느라 가방을 뒤지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때 가방 안에서 닭고기인지 돼지고기였는지 모를 리버 페테(간 요리)가 들은 통조림이 떨어져 굴러가 버렸다. 오늘 먹을 식량인데 어쩌지. 어두운 숲을 더듬이며 찾았다. 더듬이는 내 손에 잡힌 것은 누군가의 신발이었다.
'하. 하... 하이' 이 어두운 숲에서 만나 반갑기도 무섭기도 한 상황에서 어쩌지. 도망가야 하나. 큰 눈과 코는 보이지만 머리와 수염으로 온통 뒤덮여 이게 여자인지 남자인지 괴물인지 알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똑바로 쳐다볼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슬픈 초록 눈빛은 너무 강렬해서 그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말을 하지도 않고, 이상한 가죽 데기를 뒤집어 입은 자연인 느낌이다. 주운 내 통조림을 손에서 보여 주더니 달라는 시늉을 한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기증하는데 합의를 한다.
여전히 헤드라이트 불빛도 안 켜지고, 숲 속의 빛은 거의 사라지기 직전이다. 생각해보니 내 휴대폰 배터리는 충분하다. 휴대폰으로 불을 켜면 되겠지 하며 찾는데 그 땡땡이씨가 나를 툭툭 치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길도 잘 안 보이는데.
1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초록빛 호수가가 나타났다. 호숫가가 깊지 않은 건지 달빛에 비추어진 호숫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가라앉은 나무와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신기하게 비치 같은 느낌의 하얀 모래사장도 있고, 누군가의 작은 카누며 패들보드도 있었다. 근처를 둘러보니 동굴도 있고, 누군가가 저녁을 먹었는지 차를 마셨는지 불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쌀쌀한 가을밤에 추웠어서 나도 모르게 불씨 위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집에서 싸온 보온병을 열어 커피를 만들었다. 할 수 없이 여기서 텐트를 치고 자야 하나. 이상하리라 할 만큼 고요하고 바람도 안 불고 덜 추웠다. 텐트를 치고 한참을 앉아서 초록빛 호숫가를 보는데 무언가가 튀어 오른다. 뭐지. 한두 번 그러더니 여기저기 튀어 오른다.
송어다.
땡땡이씨가 낚싯대를 들고 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플라잉 낚시를 한다. 적당한 송어 한 마리를 잡아서 손질을 한다. 손질한 송어를 나뭇가지에 꽂아 아까 조금 남아있던 불씨를 살려 위에 얹어 굽는다. 맛있는 냄새.
그 사람도 생선을 좋아해서 바다에서 잡으면 늘 손질해서 나와 아이들을 구워주고는 했는데.
눈이 감긴다.
나는 그 초록 빛깔의 호숫가에 들어간다. 왜 들어가는 거지. 이 추운 밤에 들어가서 뭘 하려는 거야. 아무도 날 오라고 하지도 않는데 자꾸 끌린다. 너도 혼자야? 나도 그래. 넌 왜 이리 예쁜 빛깔인 거야? 이런 초록 빛깔은 처음 봐. 눈을 비비다가 아까부터 쓰고 있던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다가 불빛이 켜진다. 그 불빛이 땡땡이씨를 비추고 있었다.
'아악' 하며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땡땡이씨가 퍽 쓰러진다.
점점 그 모습이 작아지더니 동굴 속으로 도망가 버린다.
그때 처음 봤다. 그 초록 호수는 그 초록빛 눈과 너무 닮아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텐트 밖에서 침낭을 대충 두르고 자고 있었다니. 발자국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등산객이다. 히테(Hytte)가 호숫가 바로 위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아름다운 폭포, 알록달록한 나무들이며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히테(Hytte)에 가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무얼 한 거지.
내가 밤새지 낸 이곳에 표시판 하나가 있었다.
트롤(Troll) 출몰지역! 트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 것!
*투르(Tur)앱: 등산로 안내 앱
*히테(Hytte) : 노르웨이 산장 혹은 별장
*트롤(Troll):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