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짝이는 작은 구두를 보니, '어? 파리즈.. 씨? 전화도 없이 왜 들어왔지?’
파리즈 씨는 우리 집 운전기사이다.
7년 전 아제르바이잔에 이사 온 이후로 우리 집에 두 번째로 고용된 젊은 남자 운전기사님이다.
겨우 25살이니 나와도 나이 차이가 많지 않다. 파리즈 씨가 한국어 학과를 나와서 우린 한국어로 대화한다. 이곳 바쿠 국립대학에는 한국어를 전공하는 이들도 꽤 있고, 케이팝 덕분에 한국어도 한국 상품들도 인기가 많다. 교육열 높은 바쿠에는 대학 졸업생들이 많지만,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서 운전기사일을 많이 한다. 남자들은 일찌감치 운전기사나 경비원 일들을 많이 한다. 이곳 바쿠에는 외국 석유회사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외국인의 운전기사일이라도 맡게 되면 매달 미화 600달러는 보장이 되고, 이는 일반 직장인들의 두배 가까이 되는 돈이니 누구나 하려고 한다.
파리즈 씨는 말을 더듬거리더니 “사.. 살람(Salam), 저.. 며.. 몇 시에 끝날 예정인가요?” 라고 물어본다. 내가 분명 그냥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오늘따라 아무런 이유 없이 들어와서 말을 건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밖에서 대기해주세요.” 나는 무뚝뚝하며 신경질이 난 말투로 대답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파리즈 씨는 알았다며 카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주말이지만, 택시를 타기 싫어서 불렀는데 그게 불만인가. 근무 외 수당도 지급하기로 했는데 말이다.
지인의 회사에 한국에서 3주간 출장 온 젊은 사람을 만나보라며 갑작스러운 소개팅이 이루어졌고, 그는 정말이지 내 스타일이었다. 깔끔한 외모, 단정히 빗어 넘긴 앞 머리카락, 하얀 티셔츠에 하늘빛 얇은 여름 재킷과 베이지 색 면바지에 갈색 로퍼를 신고 나왔다. 일주일 후면 한국에 돌아갈 사람이라 안 하려고 했다. 인연이 될 수 있지 않겠냐며 설득했던 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수백 번 하리라 다짐했다.
오늘따라 날씨마저 끝내 주었고, 일요일이었기에 우린 브런치를 할 수 있는 장소에서 소개팅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답답한 호텔 안 레스토랑과 카페보다 밖이 훤히 내다 보이는 실내이거나 야외를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같았으면 예쁘고 고급스러운 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차를 마셨겠지만, 아제르바이잔스러운 곳에서 새로운 만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제르바이잔 스타일의 조식을 끝내주게 잘하는 이 집은 바쿠에 살면 다 아는 '할머니 밥집'이라는 곳이고, 우리는 이곳에 앉아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드시티가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오전 11시, 우리처럼 브런치를 먹으러 온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골목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 외에도 오늘 하루 장사를 시작하는 실크 스카프와 카펫 파는 상인들, 석류주스를 마시라고 권하는 어린 소년들이며 각종 기념품들 특히 액세서리나 장식품들을 파는 나이 드신 거리 상인들도 많다. 일요일에도 여느 때처럼 이들만의 삶이 이어지는 곳이다. 흥겹게 흘러나오는 전통음악은 북소리 덕에 분위기를 한껏 들뜨게 했으며, 우리가 시킨 음식들은 이 채식주의 남자에게는 최고의 메뉴들이다. 이 집에서 직접 만든 하얀 치즈, 꿀, 버터, 시큼한 콰틱 요거트(qatik) 그리고 지하 화덕에서 갓 구워 쫄깃한 빵 쵸렉(chorek)과 오로지 초록이로 이루어진 초반(Choban) 샐러드는 무척이나 신기한 밥상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크레페 종류인 호박 맛 큐탑 (Qutab)과 계란과 허브가 잔뜩 들어간 일종의 오믈렛인 쿠쿠(Kuku)는 입맛을 돋구웠다. 우리는 전통 유리 찻잔인 알무두(Armudu)잔으로 홍차를 몇 번이고 따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얼마만의 외출인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가족이 있는 이곳 아제르바이잔으로 들어와 매일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을 한지도 2년이다. 한국인 교민도 거의 없고 회사에 적응하느라 매일매일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 살면서 보여주려 꾸며진 과장된 도시며 매년 심어도 자라지 않는 나무며 석유 냄새나는 바다를 늘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곳이다. 가족과 함께 고등학교 3학년 때 이곳에 와서 일 년 후 한국에 돌아갔던 터라 친구도 별로 없었고, 그 후로 4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도 크게 정을 부치지 못하고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올드시티에서 바로 보이는 카스피해, 파란 하늘, 그대로 보존된 유적지며, 이국적인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들 그리고 전통옷 입은 상인들 모습까지 모두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 무엇보다 이 얼마 만에 만나보는 한국 사람 인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 기분만은 그랬다.
그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활짝 열린 창 사이로 커튼이 내 머리 위쪽으로 불어왔다.
바깥에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쓰고 파리즈 씨가 차 안에서 대기 중이다. 마치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9월이 되자 아침 기온이 조금 떨어져서 25도 정도 되는 것 같다. 멋진 곳에 출장 왔다는 그는 커튼을 치워주며 살갑게 웃어 주었다. '나를 보고 웃은 거지?' 살짝 어색한 어투의 표준어를 구사하려는 그가 귀여웠다. 외모며 키며 모든 것이 나를 설레게 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마치 남자 친구와 유럽에 관광 온 것 같았다. 두어 시간을 보낸 브런치 밥집에서 밖에 나가 걷기로 했다. 파리즈 씨에게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문자를 보낸 뒤였다.
작은 나무 탁자를 펴고 기념품 파는 상인들이 블록마다 가득한 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바닥에 보자기를 펼치고 장사하던 한 노인이 다가와 33개의 비즈가 달린 묵주와 부타(Buta) 문양이 가득 그려진 빨간 실크 스카프를 보여준다. 지난 2주간 아무것도 사지 않았던 것인지 이 남자는 관심 있게 물건들을 보더니 빨간 스카프를 하나 샀다. 빨간 스카프와 같이 부타(Buta)가 그려진 된 전통 문양의 빨간 카펫이 여기저기 보인다. 거리마다 보이는 알록달록한 석류, 피조아, 사과 그리고 무화과 마저 내 코와 눈을 자극한다. 기분 좋은 일요일이다. 한참을 길거리 상점들만 구경하다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에 이끌려 아치 모양의 통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무슨 잔치가 있는 것인지 시끄러운 음악과 예쁜 모양의 꽃이며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전통 음식들이 빨간색의 리본이나 꽃과 부타 문양의 스카프들 사이에 장식되어 있었다. 아까 길에서 보았던 그 노인이 다가와 저녁에 결혼식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한참을 올드타운 끝 쪽에서 길을 건너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걷는데, 소개팅 한 남자가 묻는다. “아까 그 운전기사분 한국어를 잘하시던데 혹시 이곳 바쿠와 근교 관광 가이드를 부탁해도 될까요?” 나는 이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말에는 보통 쉬시니까 돌아오는 일요일에 가능한지 물어볼게요.”라고 말했다. “아 정말이요? 그럼 저는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떠나기 전에 그 분만 시간 되시면 설명 들으면서 도시 한 바퀴 돌아보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시급은 넉넉히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오늘은 오후 늦게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서요. 다음에 또 뵐게요.”
“아 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남자는 갑자기 인사를 하더니 “그럼 연락 주세요” 하며 급하게 떠났다.
'저, 저도.. 관광할 때 동행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이런 낭패가.. 카스피해 해변 공원을 걷다가 카펫 박물관도 가고 야경을 보며 저녁도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나만 설렜던 것일까.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한주도 금방 지나갔다. 토요일에는 요즘 새로 시작한 러시아어 공부를 하느라 지나갔고, 일요일이 되자 지난주에 했던 소개팅과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주 소개팅 후 파리즈 씨에게 그 남자 연락처와 관광 부탁만 하고는 까맣게 잊은 것이다. ‘둘은 잘 만나서 관광은 잘했나. 화요일 저녁 10시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또 보자고 해 놓고 못 만났잖아’.
공항에 가서 잠깐이라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녁 8시에 무작정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갔다. 30분 거리의 공항에 도착하자 원래 사람이 드문 공항이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려 했는데, 공항 앞에 그 남자를 보고 손을 흔드는 키 작고 낯익은 얼굴도 보인다.
그 키 작은 남자의 한 손에는 빨간 실크 스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파리즈 씨!...?.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 의 수도명
*살람(Salam) : 안녕하세요
*아제르바이잔 전통 음식 이름들: 콰틱 (qatik), 쵸렉(chorek), 초반(Choban), 큐탑 (Qutab), 쿠쿠(Kuku)
*부타(Buta): 여러 의미 중 삶과 불의 의미가 있고 결혼식 예복에 자주 보이는 무늬/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