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음악도 좋고, 서울 야경은 더 멋지네'
의미없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 잔으로 두 잔 정도 했는데, 여러 사람들과 자주 소통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더 이상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지 않았다. 오늘 집을 선뜻 내어준 이는 그나마 회사에서 친한 동료이자 친구인 R이다. R은 아이가 둘이고 이미 결혼한 주부이자 워킹맘 미국인이다. 미국인 대표로 본인이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 파티를 연 것이다. 올해에도 여김 없이 손님들에게 윤기 흐르는 칠면조 요리와 곁들일 빵과 크랜베리 소스 외에 각종 음료, 술, 그리고 치즈와 과일 등의 핑거푸드와 디저트를 제공하였다. 아파트이지만 맨 꼭대기 위층에 거실과 연결된 큰 발코니에서 파티를 했다. 가족 침실이 일층이고 거실과 주방이 위층인 특이한 복층 구조라서 층간소음도 없는 파티하기 좋은 장소이다.
거실 중앙에는 음식들이 놓아져 있고, 소파와 창가의 하이체어에는 손님들이 각자 원하는 음료를 가지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R이 텔레비전에 장작불 타는 비디오를 켜놓았다. 오늘도 포트락 파티라서 손님들 각자 음식 한 가지를 가지고 왔기에 음식이 다양했다. 한국인 직원들이 가져온 김밥, 잡채, 부침개, 불고기는 물론이고 미트볼, 샐러드, 파스타, 빠에야, 타파스 그리고 다양한 케이크들까지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웠다. 나는 오늘 마늘과 간장으로 졸인 일본식 가지 요리를 가져왔다. 나를 포함하여 채식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아서 포트락 파티에는 보통 야채 요리를 가져간다. 술기운에 살짝 더워서 발코니로 나왔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대부분 실내에서 있기에 발코니에서는 재즈음악 소리가 더 강하고 부드럽게 들린다.
오늘 밤엔 같이 오고 싶었는데, 그는 오지 않았다. 보기 싫은 사람들, 특히 수다쟁이 T와는 말 섞기 싫다는 그는 결국 오지 않았다. 외국계열 회사인 우리 회사에는 몇몇 외국인 신분의 직원들이 리더십팀에 있다. 그중 한 명이 내 연인 H이다. 회사 정황상 대부분의 업무시간에는 영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특이한 발음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알게 되어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나와는 나이차가 꽤 나는 터라 그는 리더십팀에, 나는 평범한 마케팅팀 직원이다.
11년 만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발령받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서울은 낯선 땅이다. 게다가 내 고향인 서울은 그대로가 아니다. 더 많아지고 높아진 아파트들, 스마트하게 돌아가는 전광판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유럽풍 레스토랑 그리고 고급스럽게 꾸민 사람들은 90년대 후반과 밀레니엄 시간에 멈춰진 내 기억 속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언제 이렇게나 변했는지. 첫사랑과 거닐던 덕수궁 돌담길은 그대로 일지라도, 누군가를 사랑했던 열정도 정겨웠던 인사동 골목도 변하거나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안녕", T가 스파클링 와인 한잔을 건네며 다가왔다.
"아.. 안녕, 와인 고마워" 갑자기 이 사람에게 할 말을 찾으려니 벌써부터 질려온다. '무슨 말을 나누나..?'
"H는 안 왔어?
"응,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서.. 혹시 모르니까 주의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혹시 다음 달 파리에서 열리는 마케팅 워크숍 관심 있어? 리더십팀에서 둘, 마케팅 팀에서 두명을 보낸다고 하던데 말이야."
"... 지원했어. 아마도 나와 마케팅 팀장이랑 같이 갈 것 같은데."
"잘했네!!"
T와는 한참을 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들어주었다. 30대 후반의 T는 나와는 동갑으로 모든 것에 확신이 있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본인이 불어를 얼마만큼 하느니, 파리 맛집이 어디고, 에펠타워에는 언제 가야 하는 게 좋다는 것 등 지루한 이야기였고, 그 외에도 나에게 자랑할 만한 온갖 이야기를 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너도 지원했어?" 나는 그의 '파리 이야기'를 끊었다.
"당연하지, 비엥 수흐(bien sûr)" 하며 내 코를 눌렀다.
'아 짜증 나, 그럼 이 인간이랑 다녀야 하는 거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와인을 다급히 비운 후 T를 피해 한잔을 더 가지러 거실로 들어갔다.
그때, R이 와인잔을 살짝 부딪치며 주목시키더니, 온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오늘은 특별히 다양한 수공예품을 파시는 분을 초대했으니 물건들을 구경해 보고 필요하면 사라고 권해준다. 그러고 보니 거실 한편에는 여러 가지 액세서리, 스카프, 유리공예 등이 보였다. 그 특별한 셀러 한 분은 손님들과 섞여 있어 보이지 않고, 물건들만 마치 전시장에 전시된 것처럼 벽에 차례대로 가격표와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수공예품들이 오늘의 주인공인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미 물건들을 본 건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찬찬히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참 많았다. 대부분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이었는데, 그중 투박한 은반지, 가죽 팔찌, 목걸이는 남자가 써도 될만했다. H가 떠올랐다. 액세서리를 하지는 않지만, 선물용으로 괜찮지 않을까, 특히 동물뼈나 옥돌을 깎아 만든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들이 괜찮아 보였다. 그중 내가 만지락 거리고 있던 나선(Spiral)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는 코루(Koru)라는 이름과 설명이 쓰여 있었다. '새로운 시작... 음 그럼 의미가 안 맞는데...' 나는 아까 주의 깊게 보아 두었던 가죽 팔찌 두 개와 스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스카프가 생각보다 커서 머리부터 어깨로 둘러보려고 하였는데, 미끄러지면 그대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써졌다. 그때 누군가가 내 이마 위에 머리띠 같은 것을 둘러 스카프가 차르륵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을 감싸더니 내 눈앞에 영화 같은 화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장면들이 너무 생생하다.
파리에서 열리는 일주일 워크숍에는 역시나 T를 포함하여 마켓팀 팀장과 한국인인 내가 가게 되었다. H는 아쉽게도 중요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계약건 때문에 하루 늦게 합류하기로 하였다. 파리행 직행 비행기 안에서도 쉴 새 없이 떠드는 T덕분에 팀장님과 나는 지루하지 않게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얼마 전 파티에서 구입한 스카프를 얇은 핸드메이드 코트 안에 두르고 왼쪽 팔에 새로 산 커플 가죽 팔찌를 찼다. 요즘따라 회사일때문인지 저기압인 H에게 미처 가죽 팔찌를 주지도 못했다. 파리에 가서 근사한 곳에서 저녁 먹을 때 줘야겠다 생각했다.
사실은 그와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
13년이라는 나이 차이와 국제커플에서 있을만한 문화와 언어차이 문제라기보다,
그는 나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사귀자고 말한 것도 나고,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내가 먼저이다. 그는 조용히 따라와 주었다. 20대에 떠난 미국에서는 그냥 혼자 살아도 좋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결혼은 안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줄줄이 실패한 연애에 기가 죽었다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와 사귄지 일년도 안 되었으니, 서로 좋아 죽어야 할 시점에 우리는 참 평온하다.
편안하지만 큰 발전이 없는 수평선 관계이다.
우리가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이대로 나는 또 그와 헤어지는 건 아닐까. 확신이 없다.
H는 파리 워크숍 2일 차에 합류했고, 무척이나 긴장되어 보였다. 유독 회사에서나 밖에서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집에서 둘이 있을 때는 그 누구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이다. 대화할 때도 농담을 자주해서 늘 나를 웃게 한다. 첫사랑이 주었던 큰 설레임과 불타는 열정은 없다지만 나에게 이사람은 소중하다.
'일이 잘 안 풀렸나, 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걱정되었다. 워크숍 4일 차에는 팀원들 각자 저녁을 따로 먹기로 했다. 드디어 H와 데이트 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H는 여전히 불안하고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으며, 식사 주문한 후에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그때 첫 번째 주문한 애피타이저인 버터에 구운 달팽이 요리와 버섯 수프가 나왔다. 달팽이 요리를 시킨 H는 두 개를 먹더니 못 먹을 맛이란다. 우리는 버섯 수프로 이상한 달팽이 음식이 씻어 내려가기를 바랐다. 메인으로 홍합탕과 생굴 요리를 먹은 후 디저트를 시켰다. 달팽이 음식만 빼고는 최고의 맛이었다. T가 떠들어댄 이야기 해준 것 중 그나마 쓸만한 정보였다. Odéon 전철역 근처에 위치한 Le Procope 레스토랑은 1686년에 파리에서 영업을 시작한 오래된 가게 중 하나인데 웨이터며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며 그날 저녁 분위기는 마치 17세기로 돌아간 것 같이 느껴진다.
"자기야 무슨 일 있어? 내가 도와줄 거라도 있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건 없어." H는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여기 어때? 친구 추천으로 예약한 곳인데.."
"응 좋아." H는 맥주를 기분 좋게 들이켠다.
나도 아까 시킨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하고는, 식사 후 무얼 한 건지 어디를 갈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웨이터가 한참 전에 시킨 디저트를 막 가지고 나왔을 때, 갑자기 클라식 음악이 꺼졌다.
H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내가 당신 사랑해."
"응? 갑자기?" 나는 너무 놀라서 이것도 농담인가 싶어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어. 당신이 그렇게 고백할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난 외국인이고, 나이도 많고..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더라고. 그래서 망설였어", " 그런데 이제 말해야 겠어. 내가 더 당신을 좋아해. 당신과 평생 함께하고 싶어." '이건 프로포즈?'. H는 진심이었다.
음악이 다시 들리더니... 모든 장면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카프가 눈물에 들러붙었다. '내가 H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잖아.... '스카프를 벗어 움켜쥐고는 가죽 팔찌를 제자리에 두었다. 코루(Koru)라고 적혀있었던 나선형 목걸이를 집어서 물건값을 지불하려고 보니 R이 보였다. R은 내가 들고 있는 목걸이와 스카프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고 했다. '아.. 아쉽네.'
물도 제대로 안 마시고 와인을 마신 탓인지 어지러웠다. 집으로 가려고 아파트에서 나와 계단에 앉아 바람을 쐬며 택시를 부르려고 앉아있는데, 건너편 주차장에서 H가 자가용의 하이빔 라이트를 깜빡였다.
'어. 연락도 없이 왔네..? 다행이다'
차에 타고 보니, 그는 그 코루(Koru)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고, 내가 써 본 그 스카프를 나에게 씌워주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사랑해."
오늘 우리는 새롭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