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사각사각 들리는 소리.
조용한 발걸음.
책 냄새.
학교에서 작업실 외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다. 내가 원하는 책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읽을 수도 있다. 도서관은 내 눈과 내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다.
가을이라 아무래도 감성이 폭발하는 중인 걸까. 창가를 보면서 걷다가 신간 코너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
하필 쟤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상대하기도 귀찮다. 어디 갔지? 내 모자.
"야!"
" 어? 어디 갔지? "
그 애 앞에서 또 사라져 버렸다.
'정말 귀찮은 애야. 애들마다 말꼬리 잡고 맨날 달려드니..' 도서관에서 신간도 못 빌리고 빠져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애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 화장실에서 모자를 벗고 나왔다.
"어? 젠장."
팔짱을 끼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있다.
"너 어떻게 한 거야?"
"응? 뭘?"
"너 내 앞에서 사라졌잖아?"
"아닌데..?!"
"맞아 너 이게 두 번째야. 저번에는 내가 널 잘 못 본 줄 알았는데, 오늘은 확실해. 나랑 이야기 좀 해"
"네가 잘못 본거야, 진짜야.. 그리고 너랑은 할 말 없어"
"강한 부정이 이상한데,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결국 그 애에 큰 소리를 듣기 싫어 아무도 없는 동아리 방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변명하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모자를 쓰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을. 미친 줄 알 거 아니야 그것보다 내가 왜 이걸 밝혀야 해? 그냥 잡아떼자. 아니라고 하면 되지' 같이 걸어가는 내내 고민을 했다.
나한테 꼬투리를 잡아 쏘아댈 줄 알았던 그 애는 오늘은 조용했다.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동아리 방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지.'
"너 사라지는 거 봤어. 어떻게 한 거야?"
역시 내 예상과 같은 질문이다.
"그런 적 없어, 네가 잘 못 본 거야." 나는 딱 잡아뗐다.
"이렇게 했잖아!" 그 애는 스카프 한 장을 꺼내 목에 두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뭐야! 나랑 같은 술법을 쓰잖아.'
"난 보여줬다. 이제 네가 말해봐. 너도 사라질 수 있잖아. 나 사실 알고 싶어. 네가 진짜로 같은 술법으로 사라졌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
난 결국 말하지 않고 뛰쳐나왔다. 숨이 막혔다. '저 애는 어떻게 한 거지. 왜 할 수 있는 거지? 할머니는 분명 나만 가지고 있는 비밀이라고 했는데..' 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할머니가 주신 물건들과 앨범을 찾았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앨범. 신기하게 8살 이전 기억은 전혀 안 나지만, 사진 속 나는 부모님과 행복한 모습들 뿐이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해 주셨다. 보고 싶다. 앨범을 한 참 보고 있는데, 유난히 닳은 사진 한 장이 보였다. 꺼내 보니 사진이 일부분 찢겨 있었다. 부모님과 내가 찍은 사진인데 사진 끝자락은 찢어서 접혀 있었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안부 인사를 물을 계획이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신다.
불안한 마음에 이웃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지혜예요. 혹시 저희 할머니 괜찮은지 가 봐주실래요?"
할머니가 이사를 갔으며, 가실 때 남긴 편지가 있다고 했다. 내가 전화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이사라니.'
할머니 고향집으로 가야만 했다. '무슨 일 일까. 빚을 지신 걸까. 몸이 안 좋아지신 것일까.' 온갖 상상을 하며 갔다. 십 년간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혜야. 할미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네 친할머니가 아니란다.
너를 욕심냈어.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네 가족을 찾기를 바란다.'
서울시ㅇㅇ구 ㅇㅇ동 ㅇㅇ 아파트 304동 501호.
나의 하나뿐인 가족이 가족이 아니라니.
'뭐라고!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하루에 몇 가지 일이 일어난 거야?' 내일은 나의 만 스무 살 생일이다. 생일 선물치 고는 너무 무섭고 황당한 일들이다. 그 애를 만난 순간부터 모든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와 오늘 하루 있었던 일과 지난 내 시간들을 뒤돌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이후 할머니를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만나더라도 할머니의 올라가라는 성화에 금방 헤어졌다. 할머니는 자주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고, 이제는 돌아갈 때다는 말을 내뱉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십 년 전이나 변함없는 젊은 모습이었으며 자주 나에게 모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 내가 모자를 쓰고 투명인간이 되어 놀라게 해 드리면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늘 나와 모자를 번갈아 보며 눈물을 글썽이고는 했다. 그러면서 다른 이 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무섭게 말하고는 했다.
저녁 늦은 시간, 결국 그 집주소로 찾아갔다. 벨을 누르니 그 애가 나온다.
"어.... 너???? 이지혜!"
그 뒤에 그 애의 부모님도 따라 나온다.
"엄마... 아빠..?" 분명 사진 속 나의 부모님이다.
한분은 모자를 들고 계시고, 다른 분은 스카프를 들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