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의 힘
초록빛과 연한 파란빛이 오묘하게 섞인 빛이 천장에 뿌려져 있다. 곧 초록과 파란빛이 나누어져 열릴 것만 같은 신비한 느낌의 방이었다. 1미터 정도 간격으로 파란빛 조명이 하얀 벽을 비추고 있었다. 점술사의 방이라고 하지만 춥고, 신비함까지 느껴졌으켜 내가 마치 아이스 호텔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가방 속에 있던 보랏빛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두르고 예쁜 타일로 둘러진 작은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안에는 파랗고 하얀 타일이 정교하게 놓아져 있었는데, 중앙에는 작고 노란 별들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져 있었다. 탁자 위에서 밝히고 있는 초록색 작은 양초가 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조금 지나자 나이 든 초록눈의 점술사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방안에는 커다란 고동색 테이블 옆에 점술사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다. 그 방에도 여전히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긴 초록빛이 커다랗게 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서 와요. 무엇이 궁금.. 음...?" 갑자기 점술사는 눈을 크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보시죠?"
"원하는 소원 있어? 무엇이든 내가 한 가지 들어줄게"
"소원이요...? " '점술사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응 점술사지만 소원 한 가지 들어줄게.."
'앗 내 혼잣말이 들리나 봐'
"응 들려.."
"네... 저... 특별한 힘을 갖고 싶어요. 그 어느 것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그 누구보다 자신 있게 살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요. 최고가 되고 싶어요."
이런 곳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싫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 대기업 면접에 통과할 수 있을지 아님 내가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고 싶었다. 내 나이 겨우 스물여덟 아닌가.
"그래 내가 그 힘을 주지.. 그 힘은 나중에 어떠한 형태로 바뀔지 몰라. 네가 원하는 힘은 최고가 되는 힘이지만, 네 자손들은 다른 힘을 가질지도 몰라. 대신 나중에 네 자손이 쌍둥이를 낳으면 한 아이를 내게 준다고 약속해. 그 아이와 그 부모는 기억을 잃고 떨어져 살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힘을 원한다면 이것을 네 몸에 지니고 다녀." 점술사는 작은 초록빛 돌을 쥐어 주었다.
***
낙오자로 찍히는 이대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죽기에는 내가 노력해온 그 삶이 아깝다. 벼랑 끝에서 나를 놓아버릴 용기도 없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외고 학생 시절 내내 꼴찌 아닌 꼴찌였고, 원하던 대학교를 못 들어갔을 때는, 일등 아닌 일등이었다.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데, 나는 그저 앞서가는 이들의 세계에서는 낙오자였고, 그 외의 세계에서는 앞서 나아가 보여도 나아간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성적, 대학 간판, 대기업... 이런 것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무엇 하나 잘 되는 것이 없었다. 알고 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언제 이런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의미 없이 죽어버릴까 하고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갔다. 바닷가 앞에서 한없이 바보 같은 생각에 짓눌려 있는데 아름다운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까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무심코 하늘을 째려보며 의미 없는 하늘 탓을 한다. 갑자기 하늘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발끝 쪽에 펄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누가 버리고 간 것이지, 돌 사이에 껴있는 종이 쪼가리이다.
'불안하십니까? 미래를 알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오로라 점술사'
'이런 거 따위가 과연...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보면 좋겠지...? 호기심 반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
한동안은 백 살이 넘은 할머니 말을 듣고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딸 미혜가 어느 날 본인과 비슷한 술법을 부리는 이지혜라는 아이를 이야기해주면서부터는 매일 밤 이상한 꿈을 꿨다. 일찍이 돌아가신 엄마 대신 늘 나이가 드신 할머니에게 의지했기에 그날도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매일 밤 반복되는 그 꿈에는 알지 못하는 쌍둥이 딸들의 탄생부터 8년간의 행복한 시절이 보였다. 그날 이후 할머니와 함께 강릉으로 가족여행을 갔는데,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지난 비밀을 이야기해 주셨다.
***
"나는 괜찮다고 했다. 무엇이든 드릴 테니 힘을 달라고. 고작 스물여덟이었고, 사실 작은 돌덩이가 과연 내게 힘을 줄까.. 하며 덥석 받은 거야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는 대기업에 입사했고, 크게 성공해서 임원이 되었어. 그리고 좋은 사람과 결혼도 하였지. 자식들이 태어나고 부유하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딸은 스카프로 아들은 모자로 투명인간이 되지 않겠어? 다른 술법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리고 내 딸 그러니까 네 엄마는 너와 네 남동생에게 같은 술법을 물려주었지.. 이렇게 자손 대대로 힘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어. 어느 날 그 점술사가 나타났지 그러더니 8살 되던 해에 너의 쌍둥이 딸들 중 한 명을 데려간 거야. 내 손녀딸 지혜를… 약속한 거라며 나에게 예고까지 해 주었지... 미안하다 이 할미 잘못이야. "
그날 할머니는 예쁘고 신비한 초록빛 돌을 바다로 던지시며 용서를 구했다. 그때 바다로 떨어진 작은 돌은 갑자기 바다 위로 튕겨 떠오르는 동시에 하늘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아름다운 초록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질듯한 물결이 춤을 추었다. 한동안 초록빛 잔치가 열리더니 무지개 빛 별똥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마치 불꽃축제를 하는 듯했다.
그날 이후 이지혜라는 아이가 찾아왔고, 나는 예전 필름 카메라의 필름이 천천히 현상되는 듯 머릿속에는 꿈에서 얼핏 본듯한 옛 기억들이 서서히 파고들었다. ‘그래 너는 내 쌍둥이 딸 중 지혜구나! 12년 전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찾아왔던 그 초록눈 노인네가 널 데려간 거구나’. 순간 우리가 들고 있던 스카프와 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잘 돌아왔어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