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은 유난히 깔끔하다 생각했다. 딱딱하지만 정감 가는 가죽 매트가 깔린 커다란 책상과 작은 카펫이 깔린 탁자는 고급스럽다. 하물며 소파 위치나 작은 호박 보석이 알알이 박힌 램프는 낯익다. 어두운 초록빛 벨벳 커튼과 고동 빛깔의 가구들이 주는 중후함과 따뜻한 느낌이 가득한 방이라 생각했다. 고작 작은 헤드라이트를 켜서 보고 있기에 전체적인 분위기 알 수 없지만, 마치 내가 요가를 하고 나서 명상에 깃든 편안한 상태의 감정까지 가져다준다. 이 방의 램프 외에 유일한 장식품인 나무로 만든 코끼리 조각상이 보여 돌아보니 그 옆에 인센트 스틱과 홀더가 눈에 띈다. 아 이 향 때문이었나. 책상 위에는 컴퓨터 한 대와 노트패드 그리고 펜 한 자루만이 올려져 있다. 남의 방에서 감상에 젖히게 만든 이 방 주인은 도대체 누굴까? 책 한 권 꽂혀있지 않고 필요한 것만 가져다 놓은 작은 오피스 쇼윈도 같았다. 잠깐 사이에 딴생각을 했는데 무언가 발에 밟힌다. '뭐지' 주어서 보니 도토리 한알이었다. '이런 곳에 도토리라니' 피식 웃고 말았다.
'누가 도토리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는데..'
의뢰인이 원하는 정보는 에이콘 12 파일에 있었고, 85 프로 정도 마지막 복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책상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문을 잠가 두었고, 문 앞에는 무음 알람을 설치해 두었기에 시간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다. 복사만 마치면 바로 창문으로 넘어갈 작정이다.
갑자기 내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놀래라. 에이 하필 지금' 급하게 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네. 네? 이미 다 끊어져 있습니다.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복도에서 걷고 있던 사람의 전화가 울려 통화를 하는지 다행히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지? 경비원인가 이 새벽에.'
복사를 다한 USB를 빼고, 창문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져나왔다. 아니 도토리를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어 온 것을 제외하고. 일요일 새벽에 누군가 회사 안에 있을 줄이야. 토요일 저녁에 창립행사도 하고 분명히 아무도 없을 시간이었는데.
***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인사 공고가 나서 보니 생각지 않게 서울 발령과 함께 승진이 되었다. 남들보다 이른 승진이다. 2년 전 연고 없는 제주도에 내려와서 한참 힘들었고, 도시가 그리웠던 차였다. 알고 입사했지만 서울 본사에서 제주도로 발령 났을 때는 살짝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 같은 날 함께 기쁨을 나눌 지인은 모두 서울에 있으니 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에 내가 일하고 있는 K기업이 흔들리더니, 결국 세 기업의 합병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팀의 경우 두 달 후부터는 합병하는 회사의 본사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부터 새로운 교육을 받는다고 하였다. 기업명도 JOK 기업으로 바뀐다고 하였다. 교육은 J기업에서 직접 제주도로 내려와 2주에 한 번씩 5일씩 해 준다고 하였다.
J기업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내려온 그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오하지 전무님?' 3년 전 서울 K본사에서 근무할 때, O기업의 교류 워크숍에서 뵌 적이 있었다. '분명 O기업에 근무했었는데 그 사이 회사를 옮긴 걸까' 그의 사무실에 초대를 받아서 워크숍 전에 차를 마시며 약간의 담화를 나눈 적도 있다. 유난히 깔끔한 그의 사무실이 생각난다. 온통 어두운 참나무의 가구들과 고급스러웠던 가죽 소파 등 따뜻하면서 은은한 참나무향까지 나던 그의 사무실 분위기는 참가자 대부분의 관심사였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의 외모 또한 이슈가 되었었다. 오늘따라 키가 더 훤칠하고, 긴 앞 머리를 뒤로 넘겨 얼굴이 빛나 보였다. 하얀 셔츠에 밝은 베이지색 리넨 슈츠를 입고 하늘색 캐주얼화를 신고 있었다. '리넨은 구김이 많이 가서 남자들이 휴양지에서나 입는 건데 제주도에 놀러 오셨나.' 나를 보더니 살짝 목례를 하고 윙크를 한다.
'분명 윙크였는데.. 아주 놀러 오셨군.'
'우리가 개인적으로 따로 만난 적이 있던가, 아님 이 사람 뭐지'
같은 계통의 기업이라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업무가 많이 달랐다. 새로운 인턴이 된 마냥 익혀야 할 것들도 꽤나 있었고 기존의 고객 대응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겨우 하루 교육을 받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승진도 했으니, 나에게 선물 하나는 해야지.' 집에서 와인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에 제주도에서 꽤나 유명한 와인샵으로 와인을 사러 갔다. 오늘 같은 날엔 강하고 깊은 맛으로 시작하여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게 해 주면서 베리의 산미까지 주는 쉬라즈 품종의 레드 와인이 좋을 것 같았다. 어제 장을 봐 두었던 소고기와 치즈면 저녁식사로 충분할 듯싶었다. 하지만, 이미 따둔 화이트 와인이 있어서, 한참을 박스 와인을 살까 병으로 살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혼자서 마시려면 너무 많지 않아요? 열면 한 달 안에 마시는 것이 좋은데"라고 말한다.
'응?' ,,'아 그 오하지.. 전무님?....'
"아 안녕하세요.. 아.. 박스 와인이 조금 더 저렴하고 하루 한두 잔 하니까 뭐 괜찮을 듯해서요"
'그래 박스는 양이 많지.. 승진도 했는데 병으로 살까.'
와인 샵 안에는 바다 뷰를 낀 카페 겸 바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이 남자는 그곳에서 마시던 중이었나 보다.
"같이 한잔 할래요?" 오하지 전무가 말했다.
"아니에요. 차도 가져왔고 집에 들어가 보려고요."
"아 네.. 할 말이 있는데, 그럼 혹시 이거 본인 것인가요?"
'응? 이건 USB 뚜껑? 이게 내 거라고?'
그날 정보를 복사하고 급하게 나오면서 뚜껑을 잃어버렸나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 뚜껑 없는 USB를 비우고, 다른 곳으로 옮겨 의뢰인에게 넘겼다.
'설마... 아니겠지..? 그냥 우연이겠지..'
"아닌데요. 모르겠어요. 요즘 사무실에서 USB 잘 안 쓰는데. 어디서 주우셨어요?"
그 교육관은 이미 와인을 꽤나 마신 것인지 내 손에 USB 뚜껑을 쥐어주고, 미소만 띠면서 와인을 마시던 창가로 돌아갔다. '미친놈. 오늘 하루 종일 머리 아프게 하는군'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한 후 새로 산 와인 한 병만 들고 올라가는데, 주차장에서부터 조용한 발소리가 따라오고 있다. 오늘은 계단으로 가지 말고 엘리베이터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불이 밝게 켜진 중앙 현관 쪽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다가온다.
'초저녁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곁눈으로 살짝 보는데, 그 오하지 교육관이다. 나는 그저 목례만 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려다가 비상계단으로 마음을 바꿨다. 비상계단 쪽으로 가려는데 그가 다가와 말을 건다.
"아 여기 거주하세요? 전 지인댁에서 오늘 밤 신세를 지려고 왔습니다. "
"아 네. 그럼 내일 뵐게요." 하는데 그 교육관은 벌건 얼굴과 눈동자 속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왜 이러세요..? 하면서 그의 손을 밀쳤는데 재킷 사이로 보이는 그의 셔츠에 oak라고 써진 카라와 소매 쪽 단추가 내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 귓속말을 한다.
"지난번에 고마웠어요. 덕분에 같이 일하게 되었네요. 보너스는 마음에 들어요?"
말하면서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보너스??? 라니..?'
와인잔에 거는 예쁜 도토리 참 장식품이었다.
"저기요. 예전에 O기업에서 근무하셨던 오하지 전문님 이시죠?"
그는 이번에도 윙크를 하면서 미소를 띤다.
집에 돌아와 새로 사 온 와인을 잔에 따르고, 컴퓨터를 켰다.
오늘 하루 종일 바빠서 뉴스 한 자락도 읽지 못했다.
헤드라인이 떠 있다.
'경영난으로 합병 추진 중이던 K기업 결국 J기업과 합병."
아.. 우리 회사 이름이 이틀째 나오는 군...
'O기업과 J기업의 이상한 관계'
'누군가의 배신'
'O기업의 30년 역사 물거품으로.'
'O기업 이사회에서 오 회장의 퇴임 결정, 조카 오하근(J 기업 회장)에게 경영권 넘겨줌'.
'이건 온통 오 씨들의 한마당이잖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마지막 헤드라인은 더 기가 막혔다.
'오하근 회장과 오하지 전무는 이제 JOK를 공동 경영하게 된다.'
'응? 그럼..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를 고용한 것인가? 에이콘 12 파일을 원했던 의뢰인이 오 형제...?! '
사무실에서 본 도토리 한알 그리고 와인잔 참 장식품이 떠올랐다.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