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날
'음... 아..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가 없잖아. 여기가 어디더라.. 병원? 왜 내가 여기 있지..?' 아무리 눈을 깜빡거려도 모든 상황도 주변 물건들도 흐릿하다. 팔이 아파서 눈을 비빌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귀에 들리는 것은 주파수 안 맞은 라디오가 제대로 목소리 안 내는 듯 답답한 '윙윙' 거리는 소리일 뿐.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났을까. 흐릿했던 내 시야에는 누워있는 내가 보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며 알 수 없는 기계들은 좁은 응급실 침실 안에 집어넣었다 뺐다 정신이 없다.
'아..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이건 꿈이겠지?' 혼자 중얼거린다.
"안녕?, 넌 엄청 흐릿하네. 아직 살아있구나. 넌 이름이 뭐니? 이쪽 세상에 오게 되면 너에 가슴에도 곧 네 새로운 이름이 생길 거야. 아직 저 빛이 보이는 곳으로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같이 가 줄래?" 하얀 무민같은 모습의 영혼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사람과 같은 모습이지만 모든 것이 하얕고 눈과 코 입만 정확히 보였다. 그 무민같은 모습의 영혼의 이름은 S16이었다. S16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정말로 이제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구멍이 보였다.
'뭐? 살아있다니..?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거야..?'
내 몸은 S16과는 달리 옷을 입은 반투명한 모습이었다.
***
오늘은 그동안의 각종 시간제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보건소에 출근하는 날이다. 주말 내내 들떠서 쉬지도 못하고 출근용 옷을 사러 다니고,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행복했었다.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며 자격증을 따고, 자리가 없어서 가끔 봉사만 하며 지냈는데, 꿈에 그리던 복지사가 되어 정식으로 출근하게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 남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중 우리를 살뜰히 챙겨 주었던 복지사를 보고 커서 복지사가 되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랬다. 가난했지만 나는 할머니 바람대로 착하고 성실히 살았고 그 누구도 속이지 않고 잘 살았다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내려서 십여분 걸어야 하는 출근길은 복잡한 00 시장을 지나야 도착하는 00 복지관이다. 버스 정거장부터 이어지는 길거리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 리어카에 양말 파는 아저씨, 커피차를 밀고 다니는 아줌마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순간 내가 첫 출근에 지각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이른 이 아침에, 복잡한 이 길에도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 그 생기 있게 살아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을이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에 어울리는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예쁘다. 또한 예쁜 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엔 내가 좋아하는 스웨터를 반팔 위에 입고 나왔는데 그마저 참 좋았다. 기분 좋은 출근길이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갑자기 멀리서 소란스럽게 달려오던 오토바이가 작은 키의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해 나를 치고 같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분명 그 오토바이를 피해 길 끝쪽에 서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이유 없는 사고를 당했다.
그 일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
내가 왜..? 그동안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온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하느님은 왜 나에게 이런 벌을 내리신 것일까. 받아 드릴 수가 없었다. 나오지 않는 눈물이 눈 위쪽으로 복받쳐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감싸고 나는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S16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나에게 아직 기회가 있으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응급실 한 구석에 앉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하지만 사고가 있기 전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S16은 절망하고 있는 내게 빛이 나는 작은 하트 모양의 피겨를 품에서 꺼내 주었다. 플라스틱은 아닌데 단단해 보이지만, 만지면 톡 터질 것 같은 무언지 모를 하트 모양의 물체였다. 자신이 죽었을 때 갑자기 영혼이 되어 함께 온 물건이라 했다.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이걸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S16은 전생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삶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 온다며 왠지 미안해서 하트 모양의 물건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며 덥석 받았다.
***
하트 피겨를 받았던 그 순간 S16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감겼던 눈을 다시 떴을 때 하얀 천장이 보이는 2인실 병실이었다. 간호사들이 나의 의식이 돌아온 것에 안도하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서둘러 깨웠다. 같은 병실 옆에 침대에서는 어떤 이의 심장박동이 멈추어 사망신고를 하고 있었다. 그 사망한 남자는 나처럼 크게 다쳤었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손에 작은 하트 모양의 열쇠고리를 쥐고 있었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딸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와 아이 엄마가 그 옆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요.. 오늘이 몇 월 며칠인가요? 제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지나 님 정신 드세요? 오늘은 10월 16일이에요 이지나 님이 이곳에 옆에 같이 사고 나신 분과 병원으로 오신지 일주일 되셨어요."
"제 이름이 이지나 인가요?"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지나씨, 저 기억나요?" 모르는 한 남자가 말을 건다. 하지만 내 눈길은 그 사망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머문다. 그들은 왠지 나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저... 옆에 분은 사망하신 건가요?" 간호사에게 다시 물었다.
"네.. 일주일 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뇌 수술을 하셨는데 결국 뇌사판정을 받으시고 안타깝게도 방금 떠나셨어요. 지나 님은 사고 이후 저분과 비슷한 수술을 하셨는데 혼수상태로 계셨고, 기적처럼 깨어나셨네요! 팔과 다리가 부러져서 아직 입원 치료를 하셔야 하지만 의식이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어서 회복하셔야지요."
사망신고를 받은 남자에게는 하얀 천이 씌워졌고, 어린 여자아이는 사진 한 장을 떨어뜨렸다. 흐릿한 눈을 깜빡여 다시 한번 그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 사진 속 남자의 눈은 분명 S16이었다. 그 어린 여자아이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고 눈물을 흘렸다.
"언니도 아파요?...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나는 말없이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 힘없는 손가락도 그 아이의 눈빛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 네 아빠를 만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