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이 문인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만나는 이들마다 찾고 싶어 하던 전설의 문. 전설의 문 안에는 보물이 있다는 소문 혹은 숨겨진 진실 등 많은 루머가 돌고 있었다. 짧게 찾은 유럽여행이 이 문을 찾아 헤매다 십여 년이 지나갔다. 물론 세계 각국의 문화와 음식 등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행복했다. 가끔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 정착한 곳도 있었고, 그 인연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기를 바란 적도 있다. 결국 새파랗게 젊고 용감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홀로 40대가 되어 해마다 트라우마 한 가지씩을 늘려가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
문 전체가 짙은 파란색이고 키는 나의 세배 정도 되며 너무 무거워서 밀수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의 거대한 문이다. 문에는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 과일과 잎사귀가 올록볼록하게 새겨져 있는데, 문 위쪽에는 여신이라고 느껴지는 여인이 무언가를 잡으려 손을 뻗은 채 멈추어져 있으며 그 옆에는 무기를 들은 수십 명의 장군들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회색 빛깔의 손잡이는 새의 머리 부분일 것 같은 정수리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새머리 모양 손잡이의 눈이 감겨 있다.
여기가 맞는 것일까.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던 그곳인 것일까.
쏴아 쏴아
절벽 밑으로 들어올 적에 잠깐 멈추었던 폭포수가 위에서 다시 쏟아지고 그 물은 또다시 튕겨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 폭포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꿰매 무지개도 나타난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피리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아니 휘파람 소리 인가. 그것도 아님 새소리..?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희미하고 슬픈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필리리리.. 필리리리...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문을 밀면 열 수 있는 것일까.
손잡이에 손가락을 대려다 말고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 문이 내가 찾던 그 문이기를. 이로써 나의 여행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내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손잡이에 있던 새의 머리에 박힌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찡긋한다.
'어?'
위를 올려다보자 여신이라 생각되는 여인도 혈색도는 듯한 얼굴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 나를 반기는 신호구나' 라 생각했다.
새머리 모양 손잡이를 미는 대신 새 머리 위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새가 금세 힘껏 내 손을 밀치고 날아오르더니 내 머리 위를 빙빙 돈다. 아까 들렸던 피리소리 아니 새소리를 내며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
여인은 입을 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웰컴 백 마스터'라고 하였다.
'내가 마스터(주인님)?'
커다랗고 무거워 보였던 문은 스스로 열렸고, 순간적으로 팅커벨과 같이 작은 불빛을 반짝거리며 그 손잡이 새가 안으로 들어가 벽에 있는 램프의 불을 밝혔다. '요정인가'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빛이 벽 쪽으로만 있는터라 내가 밟고 지나가는 자리는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푹신하기도 하고 분명 동굴의 딱딱한 돌과는 다른 느낌이다.
조금 걸어가자 물소리도 들리고 과수원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과일 냄새도 난다. 무언가 툭하고 떨어져서 주워보니 빨간 석류다. 단단하게 씨가 꽉 차있는 익은 이 석류에서는 강한 향이 나고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 마당에 열린 석류를 가족들과 함께 따서 먹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석류의 윗부분을 칼로 자르고 옆부분을 흠집을 낸 후 살짝 까서 알알이 박힌 씨들을 힘껏 떼어 내 입속으로 넣어 주었던 기억이다. 그때 석류알은 신기하게도 한알 한 알이 보석 같이 예뻐 보였다. 옛 기억에 한껏 취해 있을 때, 여전히 반짝이는 가루를 비추며 다니는 작은 하늘색 빛깔 새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덕분에 내가 들고 있던 석류가 제대로 보인다. 맛있겠다. 자주빛깔 석류 과즙이 내 입에서부터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음...'
조금 더 이리저리 살피니 이곳은 정원이었다. 나무마다 맛있는 과일이 가득하고, 물이 흐르며 온갖 식물들이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정원이다.
정신을 차리고 조금 더 걸어가 보니, 밝은 빛이 나는 작은 오두막이 보이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창문 옆으로 예쁜 스카프들이 돌돌 말아져 있다. 일곱 가지 색이 오묘히 섞힌 스카프부터 다양한 색깔의 스카프 들이다. '이쁘다..' 스카프들은 마치 추운 날 목에 감으면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직조 감이 두꺼운 스카프였다. 살짝 보이는 안감은 낙타나 양털로 짜인듯한 느낌이 드는 보폴이 얼핏 보인다.
그중에 석류과즙과 비슷한 자줏빛 스카프가 눈에 띈다.
어느새 나는 한 손에는 잘 익은 석류,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스카프를 들고 있다. 오두막 밖에는 내가 누우면 맞을 듯한 길이의 3인용 소파가 있었는데, 양털까지 깔려서 그 위에 꼭 앉아서 쉬어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소파에 스카프를 배에 덮고 누워 잠까지 들었다. 얼마나 따뜻한지 무거운 내 눈꺼풀은 그대로 내 눈을 눌러 밝은 빛을 꺼버렸다.
***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그 엄청난 빛이 말을 한다.
"일어나세요.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일곱시간만 허락됩니다. 주인님은 찾고 싶은 걸 찾았습니까?"
'내가 찾고 싶은 게 무엇이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문을 그토록 찾아 헤맸고 왜 찾은 것인가'
나는 나에게 묻고 있다.
말썽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 기대에 못 미치는 취업을 한 내게 차라리 결혼을 하라고 강요하던 부모님을 등지고 나는 무작정 떠나왔다. 더 이상의 투쟁이나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그저 내 입을 닫고 그들에게서, 한국에서 나는 도망쳤다. 나는 다행히 주기적으로 세계를 돌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았다. 당당했던 일 년이 지났고, 십 여년이 지났을 때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나는 이제 견딜 수가 없다. 기댈 곳도 없는 내가 버거웠다. 나의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이제 준비되었나요?.. 일어나세요. " 그 오묘하게 밝은 빛은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 그리고 석류와 스카프를 몸에 지니고 가세요"
***
눈물이 벅차올랐다. 한참을 울었다.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따뜻한 낮잠을 잔 것도 모자라 나는 내가 무엇을 그리 찾아 헤맨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석류를 작은 가방에 넣고, 자줏빛 스카프를 목에 살짝 둘렀다.
큰 숨을 내쉬고 눈을 잠시 감았다.
가족들이 보인다.
내 가슴에 벅찬 반가움과 행복감이 깃든다. 만나고 싶다.
"잘 지냈니? 어떻게 지냈니..? 고생했다. 보고 싶었어. 너에게 미안했다. 지난 일을 잊고 이제 네가 원하는 걸 하며 살아라. 내 딸아."
문 안에서 만난 비밀 정원은 나에게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다.
그 문은 내 마음의 문이었던 것일까.